‘폭력주범’ 궁지 몰린 미국 TV 상업주의 LA폭동 등 불상사 잇따르자 “TV 폭력물 탓”
  • 시카고·조광동 ()
  • 승인 1993.08.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안마련·광고취소’ 규제 목소리 높아

미국 어린이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텔레비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텔레비전은 미국 어린이의 의식과 정서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다섯 살 안팎 어린이가 1주일에 평균 27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 지낸다는 통계가 나왔고, 많은 경우에는 텔레비전이 베이비시터(아기 보는 사람) 노릇까지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텔레비전은 좋은 친구가 되기보다는 해를 끼치는 친구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멀리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매우 어렵다. 오히려 가정이 깨어져 한쪽 부모가 늘어감에 따라 아이들이 텔레비전과 보내는 시간이 계속 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텔레비전이 인간의 생각하는 기능을 퇴화시키고 무력증을 가져다 준다는 비판은 사치한 주장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미국의 젊은이 문화나 어린이들의 의식은 텔레비전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텔레비전이 폭력 조장 시비로 요즘 미국 사회의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폭력 장면은 어린이 프로그램에까지 침투해서 90~91년 주말 어린이 텔레비전 쇼에서 한시간에 폭력 장면이 32회나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최근 물의를 빚었던 <치명적 전투>라는 폭력 비디오 게임은 등장 인물 두사람이 결투를 하다가 심장을 꺼내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방을 쓰려뜨려 죽인 후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을 꺼내는 이 게임은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심장을 꺼내는 장면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 선택하도록 하고 있지만, 게임에 몰두한 어린이들이 선택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네트워크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 커지고 있다. 텔레비전이 미국을 폭력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의회는 지난 6월 텔레비전 폭력에 관한 청문회를 가졌다. 폴 사이먼 상원의원과 에드워드 마커 하원의원이 중심이 된 이 청문회에서 CBS·NBC·ABC 등 미국의 대표적 텔레비전 방송사 회장이 나와 증언했다. CBS의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도 최근의 방송세미나에서 젊은이들이 폭력에 대해 둔감해지게 하는 데 “텔레비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폭력이 곧 미국 문화” 냉소주의 만연
 텔레비전 폭력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폴 사이먼 상원의원은 방송사가 자율 규제를 하지 않을 경우 규제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텔레비전 폭력에 대한 여론은 갱 살인의 급증,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최근 텍사스주에서 있었던 코레쉬 사교의 집단자살 사건, 뉴욕의 세계무역센타 폭파 사건으로 더욱 높아졌다. 사회가 폭력성을 더해가고, 그 원흉 중에 하나가 텔레비전이라는 지탄이 나오기 시작하자 말로만 시정하겠다고 해온 텔레비전 회사들이 긴장하게 되었다.

 텔레비전 회사가 공개적으로 폭력 프로그램을 자제하겠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폭력물을 더해가는 위선을 보인 것은 광고 수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시청률이 1% 떨어지면 1년간 4억5천만 달러의 손해를 본다는 텔레비전 방송국으로서는 시청률에 생사를 걸면서 시청자의 입맛에 따라가고 있다. 시청자가 줄면 광고주가 외면하여 광고 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결국 책임은 시청자에게 돌아가고, 미국인들은 체질적으로 폭력물을 좋아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총과 결투로 시작한 미국의 역사를 폭력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폭력은 미국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자성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러한 미국인의 폭력문화에 텔레비전의 상업주의가 편승한 것이다.

 사회비평가 조지 거브너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행복한 폭력(Happy Violence)’이란 말을 쓴다. 고전 작품에서는 비극을 상징화하는 데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희생자에 대해 고통을 느끼게 했으나 지금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 폭력 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미국 텔레비전에서 폭력을 추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만큼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문화 의식과 상업주의가 결합된 텔레비전 폭력을 누가 시정할 수 있겠느냐 하는 냉소주의에 대해 CBS의 스트링거 회장은 “우리가 이것을 고치는 데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여론 들끓자 가족물로 대체하기도
 냉소주의와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폭력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자제하고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타임 미러사의 여론조사는 72%의 시청자들이 자녀들을 위해 폭력 장면이 나올 때 텔레비전을 꺼버린다고 말하고 있고, NBC도 가을 방영할 예정이었던 <폴링다운>이 폭력성이 많다고 해서 방영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국의 태도 변화는 갑작스럽게 미국 사회의 폭력화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변한 데서 오는 바른 계산이라고 볼 수 있다.

 각 방송국의 가을 프로그램 편성을 보면 이러한 변화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수준작이라는 평을 받았던 <브룩클린 브리지> <아일 플라이> 등이 재방영되고 <발레리 버티넬리> <어게인스트 더 그레인> 등 가족물의 등장이 두드러지고 있다. 70년대 초반 냄새가 많이 나는 이같은 변화에 대해 텔레비전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이 보호 단체와 교육자·종교인 등 각 단체는 이번 기회에 텔레비전 폭력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클린턴 정부는 여기에 동조해 올 가을 대기업 대표를 불러서 폭력 프로그램에 광고를 내지 말도록 부탁할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국 관계자들도 현실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8월초 로스앤젤레스에서 모임을 가지고 대책을 협의할 예정이다. 이미 3대 텔레비전 방송국은 폭력 프로그램에 등급을 정하고 경고문을 부착하자는 원칙에 합의하였다. 담배에 경고문을 부착하는 것처럼 ‘이 프로그램은 내용에 폭력성이 있기 때문에 부모들의 주의가 요청됩니다’하는 경고문이 언제부터 부착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멀지 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