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의 ‘병사그림’은 친일”
  • 이태호 교수(전남대·미술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 ()
  • 승인 1993.08.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태호 교수 “선전효과 큰 삽화, 친일 매체 게재가 증거”

다음은 《시사저널》 196호 ‘운보는 친일파 주장, 뚜렷한 물증 없다’ 기사에 대한 李泰浩 교수(전남대·미술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의 반론이다.<편집자>

 최근 청주 지역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기념관 건립을 놓고 시민들의 반대운동이 일었다. 그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은 것이다.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 결성식날(7월13일) 필자는 연사로 초청받아 친일미술 슬라이드 강연을 다녀왔다. 그때 강연장 분위기는 양편의 감정대립이 첨예하였다. 이미 건립 반대에 대응하여 운보를 지지하는 청각장애인들이 집회를 가졌고, 협의회장 신경득 교수의 집 대문을 부순 데다 온갖 욕설을 적은 대자보를 붙인 탓이다.

 이를 계기로 운보의 친일 문제가 재론되고 몇몇 언론이 비중있게 기사화하였다. 그 성향은 민족 배신이라는 친일의 본질을 시대적 상황 논리로 비킨 채 운보의 작가적 입지를 세워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지난주 《시사저널》이 세 쪽에 걸쳐 할애한 기사와 운보의 대담도 크게 다르지 않아 아쉬웠다.

 기사에서 작품 제목이나 제작 시기 등 세부 교정의 정확성은 기자의 좋은 태도로 보여진다. 그런데 그 기자는 서두부터 ‘운보는 친일파 주장, 뚜렷한 물증없다 - 검증 없이 착각·짐작으로 마구잡이 매도’라는 논조이다. 덧붙여 “삽화 몇 점 놓고 친일이라니…”라는 미술 평론가 오광수씨의 의견으로 ‘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훈련병과 지원병을 그린 두 점의 삽화를 함께 실어놓고도 ‘운보의 명확한 친일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니 우선 이해가 안간다.

 일제 강점기 미술인의 친일 행위 중 친일 신문·잡지류에 삽화나 만화를 그리는 일이 가장 매판의 지름길이자 핵심이다. 이는 당시 미술인을 선동하는 글에 잘 드러난다. 그 예로 ‘금일의 전쟁은 선전전이 큰 역할을 하는 터라, 미술인으로서 황국신민으로서 가진 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에 보답하자’는 구본웅의 ‘사변과 미술’(<매일신보> 1940.7.9)과 ‘순수예술의 굴레를 벗고, 삽화나 무대에 참여하는 일이 전시하의 미술을 생활화하는 수단’이라는 심형구의 ‘시국의 미술’(《신시대》1941.10) 등이 있다. 운보의 삽화는 그 주장에 동조한 전형인 셈이다. 또 시국을 주제로 한 삽화는 그것의 시각적 효과와 대중적 선전력을 감안할 때 가장 명백한 친일 행위의 확증이 된다.

 <매일신보>의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 실린 운보의 삽화는 43년 8월1일부터 9일까지 시와 함께 연재한 일곱편 중 한 꼭지이다. 이 지면은 총알받이로 ‘조선인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그것을 부추기는 총독부의 선전물에 해당한다. ‘축 입영’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청년과 두 노인을 그린 운보의 그림(8월7일자)은 ‘성전에 늦게라도 불러주니 황공하다’는 내용의 김동환 시와 짝지어 실린 것이다. 김동환은 성전에 나가 어서 죽으라고 맹렬히 외쳐댄 시인이다. <총후병사>는 조선식산은행 사보 《회심》44년 4월호의 속표지화이다. 그림의 제목은 원제목이 없어서 필자가 《가나아트》에 처음 공개(1991년 7·8월호)할 때 정하였다. 병사의 모습으로 보아 전투지가 아닌 후방, 즉 銃後의 훈련병 군장에 걸맞게 지은 것이다. 이런 주제는 군국주의 망령에 동조하여 징병을 선동하던 강연이나 논설, 시문학에 버금가는 반민족적 범죄 행위이다. 민족이 처한 문제를 차치하고 서라도 전쟁터에 끌려간 당사자나 그 가족이 받은 고통과 피해가 지금도 지속되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하여는 운보 자신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삽화를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고 주었다’니…

 또한 친일 부역에 사죄를 표방하면서 ‘사상적 매국행위 없었다’라는 운보의 대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0대 장애자로서 판단이 부족해서, 협조한 것이 아니라 타의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다’ 등등. 일제말 선전과 <총후미술전>의 추천작가 대열에 오른 영광에 이어, 3·1 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등을 두루 수상한, 그의 말대로 ‘높은 나무’가 되어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생전에 기념관을 짓고 전작화집을 내려는, 원로 화가의 앞뒤가 다른 변명은 차라리 인간적인 동정심까지 일게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 개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냉엄한 역사적 과제이다. 이런 입장에서 운보 자신도 대아적 자세로 후배 미술인들이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 현대미술사의 뼈아픈 교훈이 되도록, 자타의 친일 부역 사례와 작품 자료를 스스로 증언하기를 기대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