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저의 순수한가”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08.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벌들 “정부 의식한 행동”…승용차 진출 신경 곤두세워

재벌 그룹들 사이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삼성그룹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며 동시에 질시의 표적이다. 단지 최대 외형을 다투는 회사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면에서 다른 그룹에 앞서가려는 삼성그룹의 의욕 때문이다. 삼성의 ‘제일주의’ 전략은 항상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만 재계에선 종종 구설수를 낳는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기 단계에서 다른 그룹들은 삼성그룹의 행보를 다분히 정부를 의식한 것으로 보았다. 경쟁 그룹의 한 임원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해외에서 회의를 열기 시작한 시점을 새 정부가 출범한시기와 비교해 보라”고 말한다. 이회장이 주도하는 ‘강성 개혁 드라이브’의 신호탄이 된 로스앤젤레스의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회의’는 2월18~21일 4일간 열렸다.

 이 회의와 새 정권의 출범 시기(2월25일)는 묘하게도 일치한다. 이 시기는 개혁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 정부가 문제 기업인들을 사정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재계에 팽배해 있던 때였다. 더욱이 대중 앞에 나서기 싫어했던 이회장에게는 건강과 사생활에 관해 확인할 수 없는 악성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이회장이 갑자기 해외에서 공개적인 행사를 벌인 것이다. 다른 어떤 그룹보다 재빨리 새 정권의 개혁 의지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이해하려는 태도도 무리는 아니다.

삼성측은 “평소 철학이다”강조
 삼성그룹은, 최근 잇단 해외 강연에서 밝힌 내용들은 이회장이 새 정부가 출범하기전부터 강조해온 것으로, 평소 철학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새 정부의 개혁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이회장 자신은 6월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마침 모든 걸 개혁하려고 하는 김영삼 정부에 타이밍상 편승하자”라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삼성그룹의 경영 혁신에 힘을 더해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대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규제 조처가 표면에 드러나던 4월 중순 이후 삼성그룹과 다른 그룹들은 전례 없는 상호 비방전을 치르기도 했다. ‘선수를 친’삼성그룹에 대해 피해 의식을 갖고 있던 다른 그룹들은, 삼성그룹이 고의적으로 자신들에 대한 악성 소문들을 유포시킨다고 믿었다. 정부의 사정 목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재벌 그룹과 기업인의 비리를 흘린다는 것이었다.

 반면 삼성그룹은 다른 그룹들이 삼성그룹에 대해 끊임없이 흑색 선전을 유포한다고 믿었다. 삼성그룹은 다른 그룹들이 삼성그룹에 관한 각종 소문과 유언비어를 수집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보조사 업무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의 부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삼성그룹과 다른 그룹들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라고 말한다.

 이 물밑 싸움은 5월19일을 전후해 일단락 됐다. 이 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연 30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한 것이다. 한 참석자는 ‘모든 그룹이 악성 루머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데 공감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그 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는 상호비방을 금지하기로 내부적으로 합의했다. 전경련이 공개적으로 결의하지 못한 이유는 그럴 경우 재벌 그룹끼리 서로 헐뜯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5월 하순 열린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이 자리에서 각 계열사 사장들은 오해를 살 만한 정보를 수집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각 계열사 홍보 담당자들이 회사 경영과 관련없는 정보를 조사하는데 제동이 걸렸다.

 삼성그룹이 개혁 조처의 하나로 추진중인 ‘사업구조 고도화 전략’은 삼성그룹과 다른 그룹들 간의 관계를 더욱 긴장시킬 가능성이 있다. 항공·조선·승용차 산업에서는 이미 戰端이 형성됐다. 삼성그룹은 이 세 분야에서 과감한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삼성그룹과 맞선 기업들만 해도 대한항공과 대우중공업(항공),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조선),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승용차) 등 5개 그룹 11개 계열사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삼성그룹이 공정한 경쟁보다는 ‘공연한 도발’을 일삼고 있다고 여긴다.

 이들 업체들은 정부가 6월 초 한때 내비친 적이 있는 항공산업 재편 논의가 삼성의 구도대로 될까 걱정하고 있다. 3개사나 되는 최종 조립 업체를 일원화하겠다는 정부의 구도에 따르면, 차세대전투기사업(KFP)의 주계약자로 선정돼 개발 실적이 있는 삼성항공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6월5일 항공업계 사장단 간담회와 6월15일 비공식 토론회를 거쳐 현재는 이에 관한 논의가 잠정 중단된 상태다. 항공산업 재편 논의가 본격화할 경우 삼성그룹에 대한 특혜 시비가 불거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

다른 그룹 일부 중간관리층에선 긍정 평가
 기존 조선업체들은 삼성중공업이 추진중인 조선조 증설도 반대한다. 삼성중공업은 현재의 조선 설비로는 수주 확대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조선업을 합리화 대상 업종에서 풀어 설비를 증설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쟁업체들은 섣불리 설비를 늘릴 경우 80년대와 같은 극심한 조선 불황이 재현될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해왔다.

 경쟁 업체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야는 승용차산업이다. 지난 6월9일 계열사 정리 방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공식화한 이래 삼성그룹은 승용차시장 진입을 위한 순서를 밟고 있다. 이 때문에 기존 업체들은 삼성의 잇단 개혁 조처들이 승용차시장 진입을 둘러싼 여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갖고 있다. 계열사 정리 방안도 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한 삼성의 발표는 얼핏 충격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리 대상 기업들이 대부분 적자 기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발표는 다른 그룹들의 계열사 수 줄이기 경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한 경쟁 업체의 홍보 담당자는 “잇단 삼성의 조처는 행사 같다는 인상을 준다. 목적없는 행사란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삼성그룹의 기획과 홍보 능력에 대해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건희 회장이 강연을 통해 비난한 기업들도 심기가 불편하다. 그는 특정 기업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비유를 써가며 몇몇 그룹의 행태를 비난했다. 거론된 그룹들이 이에 대해 반발하자, 삼성그룹은 자구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적 맥락을 중시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룹 차원의 이해 관계와는 달리 각 그룹의 중간 관리층들은 대개 삼성그룹의 변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일부 그룹에서는 중간 관리자들이 삼성의 개혁적 조처 가운데 일부를 수용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해외회의나 연수, 조기 출퇴근제, 질 중심의 경영을 주로 거론했다. 5월 하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장단 회의를 가진 한화그룹이나, 임원들에 대해 대규모 해외연수를 실시하는 쌍용그룹도 삼성그룹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미그룹은 임원에 한해 조기출근원칙을 정하고, 선경그룹은 조기 출퇴근제를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전자업계의 경쟁 업체인 럭키금성그룹이 질을 중시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연구한 것도 비슷한 예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은 재계의 ‘삼성 증후군’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야 구체적인 경영 혁신안들을 마련할 태세다. 모방은 독립심 강한 재벌그룹들의 체질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