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엘리자베스 바텡데르 교수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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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로의 퇴행은 없다”

60년대부터 활발히 전개되어온 여권신장 운동은 가부장제도를 급작스레 와해시켰다. 가부장제도 해체란 곧 남성 우월의식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로 인하여 변동기를 사는 남성들의 갈등은 증대된다.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된 《XY, 남성의 본질》은 이미 20개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이다. 남자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바텡데르(49) 교수에게서 현대 남성의 위기에 대해 들어본다. 프랑스 최고 명문 중의하나인 파리이공대학(에콜 폴리테크닉)에서 철학과 정신분석을 강의하는 그는 사회당 정권 초기인 84년 법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사형제도를 폐지한 로베르 바텡데르의 부인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XY, 남성의 본질》에 대한 한국 남성의 소감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못 읽어 봤습니다.
내가 저술활동을 시작한 지 15년 가까이 되었는데 대부분 여성 독자들이 내 책을 사봅니다. 아마도 내가 여권확장론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모성애가 여자의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 《여분의 사랑》이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다른 점보다 유사한 점이 더 많다고 설파한 《너는 나》, 또 남성의 본질을 새로이 조명한 《XY…》에 이르기까지, 줄곧 性 아이덴티티 문제에 집착하고 계십니다.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다시 말해서 나의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부분과 문화적으로 습득한 부분의 몫을 가려보고자 하는 것이 거의 강박관념처럼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물론 인간의 가장 내면적이고 원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감정까지도 문화의 지배를 받는다고 봐야합니다. 남녀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금기로 여기는 서구 사회와는 달리 일본에는 동성애적인 요소가 강하지 않습니까. 남자들끼리만 어울려 술을 마신다거나 여자와 남자가 모이는 장소가 따로 있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 어울려 다니면 만족감을 느끼는 건 명백하지요. 물론 육체적인 만족감이라기보다 정서적인 만족감을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어느 정도 동성애적인 교감이 있을 때 바람직한 성인 남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역설하셨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일본이나 한국 사회는 유리한 입장에 있는 셈이겠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자들의 갈등이 덜하겠지요. 정신적인 동성애는 이성애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 밑바탕이 됩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서구 산업사회의 큰 불행입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여성을 가리켜 ‘제2의 性’이라고 했다면 《XY…》에서는 오히려 제2의 성을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모든 태아는 첫 7~8주 동안 여성처럼 존재합니다. 남성으로 수정된 태아라 할지라도 Y염색체의 정상적인 활동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여성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즉 먼저 여성 상태였다가 남성으로 되어간다는 점에서 남성을 제2의 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2의 성은 또한 상대적으로 약한 성이란 말도 됩니까?
반드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남성은 반대인 성인 여성의 몸과 정신세계 속에서 9개월 동안 익숙해져 있다가 태어나기 때문에 정신기재에 있어서도 같은 성인 모친에게 동화하기만 하면 되는 여성에 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모친의 성과 자신의 성을 구분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불안정하고 허약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여성해방운동을 겪고 난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여자들이 더 강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남자의 몸에서 여자가 태어나는 일이 생긴다면 이야기는 정반대가 되겠지요.

한국 사회는 겉보기에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이지만, 여자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의 성을 따를 필요가 없다거나 남편의 월급봉투를 장악한다거나 하여 내용적으로는 여자가 지배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여자들에게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 즉 남편의 월급봉투 없이도 자기 자신과 자녀들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여자에게 실질적인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보부아르로 돌아오겠습니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를 《XY…》에서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다’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여성운동가들로부터 남성에게만 변화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하고 여성은 일단 여자로 태어났으면 그뿐이라는 생물학적 숙명론으로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보부아르가 47년에 《제2의 성》을 썼을 때에는 성 아이덴티티라는 문제의식, 즉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인데도 자신을 여성이라고 믿는(혹은 반대) 사람들의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 및 생물학적 차이에 의거해 남녀 관계를 설명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보부아르의 논리로 제 이론을 비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10여년 전부터 제가 주장해온 것은 남성 여성 모두가 남성적인 성격과 여성적인 성격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바람직한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있기 때문에 아빠들도 갓난아기를 돌봐줄 수 있으며, 여자에게도 남성적인 지배욕이 있기 때문에 정치가·군인·경영주도 될 수 있을 겁니다. 자기가 남자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진짜 사나이’처럼 보이고 싶어 람보도 되어 보고 터미네이터를 동경하기도 합니다.

나치즘이나 2차대전을 남성의 남자다움만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에 빚어진 인류의 재난이라고 해석하신 부분이 흥미롭더군요. 현재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이는 참상도 같은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집단 강간이라는 무기로 여자를 대하는 옛 유고슬라비아 군인들의 태도로 미루어 그들이 심각한 남성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모욕을 주는 것은 그 길만이 자기가 남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병적 사고방식의 표현입니다. 히틀러 정예 부대들도 온갖 가학 행위를 자행하면서 남성우월감을 만끽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식민지 시절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 전통이 뿌리 깊은 서구 사회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모의 무염시태가 사람들의 무의식에 크기 자리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예수가 태어날 때 아버지 요셉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미 현대 남성성의 위기를 예고한 것은 아닙니까?
초기 기독교 시대에 남성성의 위기가 있었다는 문헌을 아직 못보았으니 무어라 잘라 말할 수 없지요. 다만 프랑스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 경배를 시작한 것이 19세기부터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현미경의 발명과 더불어 난자와 정자의 존재가 처음으로 증명이 됩니다. 난자를 가진 여성은 난자처럼 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며, 정자는 부지런한 운동을 하므로 남자 또한 진취적이라는 성차별적 도식도 이 시기에 마련되었지요. 18세기까지도 남녀의 유사성 모델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혹시 여성의 본질에 대한 책도 준비하고 계시는지요.
아닙니다. 남성에 대한 책을 구상한 것은 그런 연구가 프랑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남성학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남녀 평등을 당연시히고, 그에 따라 남녀의 역할이 모호해지는 현 서구 사회의 변화상을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보십니까?
《XY…》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서구 사회만을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지역에서 만큼은 천재지변이나 전쟁같이 역사를 퇴행시키는 이변이 없는 한 종래의 가부장제도로 돌아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프랑스 사회에도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적입니까? 한국에서는 그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아들이나 딸이나 상관 없다고 답하는 사람이 55%에 달합니다. 이는 여성해방운동의 커다란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사회에 접근했다는 증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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