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노조없는 집’ 공사중
  • 김당 기자 ()
  • 승인 1991.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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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노동행위로 법인ㆍ사장 등 입건…‘벌금 기껏 50만원’ 와해공작 계속될 듯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란 없다”는 ‘경영철학’을 과연 언제까지 고집할 것일까. 노조를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 ‘있어서는 안될 적’으로 간주하는 일부 기업주들의 ‘불순한 사상’은 언제까지 치외법권을 누릴 것인가. 최근 노동부가 발표한 ‘현대건설 노조탈퇴 강요사건 수사결과’는 아직도 이땅의 기업인들이 노조를 적대시하고 있으며 조직적으로 노조탈퇴를 강요하는 부당노동행위를 거리낌없이 하고 있다는 혐의를 입증해주고 있다.

노동부는 2월22일 현대건설 대표이사 정훈목 사장, 김광명 부사장, 공영호 전무, 김판회 부장 등 고위간부 4명과 현대건설 법인을 노동조합법 위반혐의로 입건, 서울지검에 송치함으로써 그동안 논란이 돼온 회사쪽의 노조탈퇴 강요 등 조직적인 부당 노동행위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현대판 십이십이’ : 현대건설에서 노조탈퇴를 본격적으로 강요한 사건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훈시’에서 비롯되었다. 89년 12월12일 정회장은 계동 현대건설 본관 대강당에서 특별조회에 참석한 과장급 이상 4백20명에게 ‘과장급이상 임금인상 동결’과 ‘사무직 노조 불필요론’을 힘주어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과장급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일선에서 기름을 묻히고, 힘이 들고 땀흘리는 어려운 실정을 모른다. …나는 하이(화이트)칼라, 사무실에서 일하고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노조를 한다는 것은 웃음거리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나라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고통의 분담을 위해서 간부직원 임금동결을 부탁하는 자입니다….”
이때만 해도 언론은 정부의 임금억제 정책의 총대를 메고 나선 현대의 임금동결방침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현대그룹의 속성상 정회장의 ‘부탁말씀’이 곧 ‘율법’으로 받아들여지는 관행 때문이었다. 노조탈퇴 압력의 조짐은 바로 다음날부터 정회장의 훈시에서 ‘웃음거리’로 지적된 현대건설에서 나타났다. 왜냐하면 계동 현대사옥에 들어 있는 현대그룹 계열사 중에서 과장급 이상이 노조원으로 가입한 곳은 현대건설뿐이었기 때문이다.

12월13일부터 부서별로 노조가입 과장급 면담을 통한 탈퇴강요가 시작되었으며 이내 현대사옥 본관 5층 노조사무실은 노조탈퇴원서를 접수하려는 현대건설 과장급 이상직원들로 문전성시였다.

노조탈퇴 및 가입자수가 한달 평균 각각 10여명이던 것이 12월13일 하루에 탈퇴만 23명, 14일에는 무려 55명을 기록했다. 89년 12월 현재 현대건설노조에는 차장7명, 과장 4백46명을 포함한 조합원 2천5백40여명이 가입해 있었다. 그러나 회사쪽의 탈퇴강요 범위가 과장급에서 점차 과장진급 대상인 고참대리에게까지 확대되어 정주영 회장의 ‘훈시’ 이후 한달여만에 과장 3백12명을 포함한 4백80명이 조합을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노조쪽의 수차례 공문을 통한 탈퇴압력 중단 촉구에 회사쪽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사실부인으로 일관했다.

■메모에서 드러난 노조원 솎아내기 사례들 : 그러나 현대건설 법인과 고위 간부들이, 노동부 ‘수사결과 보고’대로, “노조를 와해(파괴)할 목적으로 지배, 개입한 혐의”는 이상수 의원이 입수해 공개한 현대건설 여러 부서 간부들의 메모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노동부에서는 2월초 2차조사보고 때까지도 현대의 부당노동행위를 ‘혐의 (찾을수) 없음’으로 일관했으나 이의원이 제시한 증거를 토대로 한 3차조사 이후 비로소 현대건설 법인과 고위간부들을 ‘혐의있음’으로 입건, 서울지검에 송치했다).

우선 90년 9월15일 마북리 인력개발원에서 실시된 부서장 합숙교육 때 해외건축부 오명길 부장이 교육노트에 적은 메모에는 “대의원 운영위원 설득 인선에 관심, 대리가입자 30%이하로, 조합비공제 중지요청서” 등이 적혀 있다. 합숙교육에 참석한 고위 중역은 이내흔 부사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같은 부서 오대철 차장 수첩(1월10)에는 “본부장님 지시사항 1, 노조31%”란 내용이 눈에 띄는데 노동부 진상조사반은 김광명 부사장(본부장)이 노조가입률을 30%선 이하로 낮추기 위해 계속 노조탈퇴에 개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해외까지 뻗친 ‘현대 팩시밀리’ : 회사에서 노조탈퇴원서를 '제공‘, 본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현장에서까지 노조탈퇴에 개입한 혐의는 여러 증거에서 나타난다. 해외토목사업본부는 90년 7월4일 쿠웨이트 키스트현장 등 10곳에 팩시밀리로 노조탈퇴원서 양식을 보낸 바 있는데 이 회사 박광용 과장이 작성한 팩스 문안은 “유첨과 같이 양식을 송부하오니 즉시 작성하여 본사(수신 :노조, 참조 : 해외토목부)로 FAX 송부 바람” 이라고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탈퇴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회사는 현장소장 책임 아래 즉석에서 받은 원영만 과장 등 현장근무자 20명의 탈퇴서를 팩스로 되받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밖에도 회사는 90년 10월14일 말레이시아 남도현장에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조합원 임영호씨 등 18명의 탈퇴서를 팩스로 받아 10월22일 노조에 일괄 제출하는 등 여러 해외현장에까지 탈퇴압력의 손길을 뻗쳤음이 드러났다. 한편 회사에서는 해외현장에 근무하다 휴가차 입국한 노조원들에게까지 탈퇴압력을 가했음이 해외토목사업본부 이응수 과장이 작성한 ‘9월 이후 휴가자’ 기록에서 드러난다. 29명의 명단이 적힌 이 기록에는 동그라미 세모 가위표 등의 표식과 함께 “설득 대상자 18명 중 제출자 8명(동일양식 미처리자 6명 포함), 설득 안된 요망자” 등의 명단과 함께 “추가 지도 요망 인원 65-(157×0.3)=18”이란 셈법이 적혀 있는데 있는데 이는 회사에서 원하는 노조가입률 30%를 적용, 앞으로도 18명을 더 노조에서 탈퇴하도록 ‘추가지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사부에서 12월24일, 1월21일 두차례에 걸쳐 해외건축부 오명길 부장에게 ‘친전’으로 보낸 조합원 명단을 보면 이름 위에 ○, ×, OK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인사부에서 자료를 작성해 부서별로 통보하면 부서장은 이를 토대로 탈퇴강요의 기본자료로 사용하면서 진행상황을 정리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노조에서 집단적 탈퇴원서 제출건을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의한 것으로 간주, 탈퇴원서를 거부하자 회사에서는 9월28일부터 탈퇴 조합원들에게서 ‘조합비공제 중지요청서’를 받아 인사부에 일괄 제출, 지난 1월말까지 4백74명의 조합비를 떼주지 않는 신종 노조와해 작전을 구사해 주목을 끌고 있다. 경우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올 들어 포항제철, 풍산금속 동래공장, 마산 코리아 다코마 등 다른 사업장에서도 집단적 노조탈퇴서 또는 조합비공제 중지요청서 제출로 인한 노조와해 조짐이 번지고 있어 임금투쟁을 앞둔 노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현대건설의 부당노동행위와 관련, 노동부에서는 “노동부가 재벌회사의 고위간부들을 부당노동행위로 입건한 것은 획기적인 조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획기적인 조처에도 불구하고 현대건설을 포함한 현대그룹내 여러 노조와 노조원들의 근무조건과 노조활동이 개선되리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입건은 되었다고 하나 전례에 비추어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죄형이 기껏 ‘벌금 50만원’을 넘지 않을 것이 뻔하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란 없다”는 맹목적 신념을 가진 기업인의 인식이 노조를 인정하려는 공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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