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의회 도배한 ‘기름종이’후보
  • 최일남 (소설가?본지 칼럼니스트) ()
  • 승인 1991.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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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을 통제.감찰하는 제도적 장치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각국의 정치 전통과 관계되기 때문인데, 스웨덴을 비롯 북유럽제국에서 시행, 발전한 ‘옴부즈만’도 그중의 하나다. 시민들이 제소하는 불만을 공정하게 조사 처리하는 일종의 행정감찰관으로서, 독립적이고도 높은 위신을 지닌 것이 옴부즈만이다.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일본지방자치단체(가와사키市)의 한 민선시장이 이 제도를 도입했다. 시의회가 엄연히 있는데도 굳이 옥상옥 같은 존재를 시장이 앞장서 임명하고 의회의 동의를 얻은 번거로움을 탓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이중 삼중의 행정감시망 속에 가두려는 자치단체장의 결벽성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건 그만두고 지방자치 하나만을 두고 볼 때, 일본은 확실히 우등생이다.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단행된 정치개혁(廢藩置縣) 이래로 따지면 1백20년의 역사를 가졌다. 맥아더가 패전 당시 일본의 민주주의 수준을 ‘12살짜리’에 비유하면서, 재벌 해체와 함께 개혁을 다그친 덕 또한 컸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는 지금 몇살인가
 막바지로 치닫는 기초의회선거를 앞두고 일본의 그것을 더 천착할 시간이 없다. 다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 지방자치제의 나이와 현주소이다. 맥아더의 말대로라면 열두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들의 지방자치는 이제 옴부즈만까지 접목할 정도로 자랐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출발점에 서있다. 30년 만의 지자제 실시라는 표현이 설명하듯, 5?16으로 무산되기 직전까지 9년간이나 지방의회를 가졌던 경험이야 있다. 더구나 한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서 처음 지자제를 실시했던 놀라운 기억은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30년의 공백은 그걸 모두 까먹게 만들었다. 축적된 노하우도 없어 후보자나 유권자 모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지방자치의 역사를 중도에 꺾어버린 독재정권들의 횡포에 절치부심할지언정 지방자치제는 낯선 얼굴로 다가서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민사회를 대변할 후보의 출현보다는, 기왕에 부유하거나 지역사회를 주름잡고 있던 유지의 행렬이 이번 선거의 주축을 이룬 인상이다. 경제적 기반이 나름대로 탄탄한 그들은 말탄 김에 경마잡히고싶은 벼슬 의식으로 출마한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로되, 지방유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지닌 암만의 재력과 官 의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관과 맞서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기 어려우므로, 싫든 좋든 관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꾀한다. 관은 관대로 不可近不可遠의 거리를 넘나들며 그들과 어울리기 쉽고, 피차 먹이사슬의 관련 사이에서 행정적 프리미엄을 주고받는 관습이 오랫동안 지속된 셈이다. 이런 풍조의 집대성이 곧 수서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有志와 油紙의 해학성이 드러내는 의미
 유지라는 칭호는 대상이 애매모호하고 기준도 벙벙한데 어느지역이든 그런 존재는 있다. 우스갯소리로 유지를 ‘油紙’로 표기하고, 그걸 다시 육두문자 같은 영어로 옮겨 ‘오일 페이퍼’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분히 해학적인데, ‘기름 먹인 종이’의 뜻은 그러나 말장난의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광택이 자르르 흐르고 질기기 때문에 눈만 흘겨도 찢어지기 쉬운 여느 종이와는 성질이 다르다는 우월감이 있다. 옛날 유지의 상업적 성공기반이 대강은 정미소나 양조장이었다면 지금은 땅장사나 돈놀이로 바뀌어 규모가 방대해졌을 뿐, 없는 사람을 항상 내려다보고 사는 속성은 엇비슷하다.

 그렇다고 유지를 모두 부정적인 시각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떻든 각개 지역사회에 군림하는 유지 그룹을 공연히 백안시할 건 없거니와, 문제는 그만한 계층이 대거 민의를 대변하겠다고 나선 현실이다. 재산 증식을 위해서, 아니꼽게 대하던 관료 앞에 유세를 부리기 위해서, 이제는 합법적인 권위까지 몸에 감으려는 후보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與性인사’가 전체 후보자의 60%를 넘고 곳에 따라서는 80%에 이른다는 분석결과가  말하듯, 그들의 ‘만년 여당’ 체질과 개혁을 싫어하는 타성이 기초의회마저 휘감는다면, 이땅의 지방자치제는 첫단추부터 잘못 낄 공산이 크다.

 그들의 입에서는 곧잘 지역발전 소리가 나온다. 내고장 발전을 누가 마다하랴만 ‘발전’의 환상에 사로잡혀서는 곤란하다. 빌딩과 공장이 줄줄이 들어서는 걸 가리켜 발전이라고 친다면, 그따위 발전은 착각으로 돌려도 좋을 선례가 얼마든지 있다. 새로 선 건물마다 캬바레 음식점 등 유흥장시설이 판을 치고, 공해가 주민의 건강을 갉아먹는 발전은 질색인 때이다. 그런 유형의 발전은 외래 자본가들에게 안마당을 내주고 검부러기 같은 돈의 훈김이나 맡을까 말까로 낙착되기 십상이다.

 ‘지방자치 0세’나 다름없는 이 시점에서 그것 하나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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