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폭행 사건은 사회위기 단면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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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는 사제관계” 흥분 앞선 언론보도

 대낮에, 학교 안에서 교수인 줄 알고도 학생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교수를 때렸다면, 이거야말로 아무리 개탄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이다. 지난 3월3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여론은 ‘막가는 사제관계’ 운운하며 흥분해 있다.

 그러나 한번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본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정확한 사실 확인과 진단이 따르지 않으면 처방을 내릴 수 없고, 사실을 모르는 국민만 착잡하게 만들 뿐이다.

 이날 학생들이 탔던 차를 운전한 사람은 국가대표 배구선수 마낙길(24)군이었다. 성균관대 배구팀의 주공격수로 활약하다 올해 졸업과 함께 현대자동차써비스에 스카웃된 마군은 4월6일 예정인 결혼 준비를 학교에 들른 길이었다. “은사 몇 명에게 청첩장을 돌리고 학과친구들과 결혼식 사회, 함들이는 문제 등을 상의하기 위해 최근에 산 차를 이날 처음으로 끌고 왔던 것”이라고 마군은 주장한다.

 사범대학에서 학과친구이자 서클(생활스포츠연구회) 동료인 김두선(체육교육과 4년·구속)군과 이현관(체육교육과 2년)군을 만났다. 이들은 입학동기이지만 군복무로 학년이 각각 다르다. 마군은 김·이군을 자신의 서울4부7436호 흰색 엑셀승용차에 태우고 사범대학 아래 구 대학원 건물 안의 서클룸에 있던 다른 친구(이철우군)를 만나기 위해 차를 그쪽으로 몰았다고 했다.

 이때가 오후 3시15분경, 건물 앞으로 들어가 주차하려 했으나 길 양쪽에 차가 빽빽히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30m쯤 앞에 있는 가정대학 근처에 차를 세우기 위해 나가던 참이었다. 이때까지 그 길이 일방통행로이며 거꾸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학생들은 주장한다. 결국 마주보고 들어오는 차 한 대와 맞닥뜨렸다.

 빨간색 르망·서울4무2285호, 바로 김정탁 교수(37·신문방송학)가 몰고 오던 차였다. 두 차는 5m 가량의 거리를 둔 채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누가 어떻게 나왔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아직은 서로의 신분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멱살잡은 교수, 입에서는 피가
 서로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그래서 민감하기 짝이 없는 이 부분의 얘기를 김교수로부터 먼저 들어보았다.

 “약 30초간 대치하다가 조수석에 앉은 학생(구속된 김두선군)이 밖으로 나오길래 창문을 열고 ‘난 신방과 김정탁 교수인데 이 학교 학생이냐’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해 차를 빼라고 했다. 그런데도 운전자가 옆의 쓰레기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켜달라는 신호를 했다. 화가 난 나머지 차를 옆에 대놓고 학생들 차쪽으로 걸어가 운전석 문을 열고 마낙길의 멱살을 잡았다. 마에게 ‘방향을 잘못 잡아 들어왔으면 차를 빼야지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버릇이야. 너도 이 학교 학생이지’라고 호통쳤다. 마는 아니라고 했다. 이때 김두선이 뒤에서 밀치며 ‘미친사람 아니야’라고 하자 이에 격분, 돌아서며 김의 뺨을 한대 때리고 ‘학생과로 가자’고 했다. 이 순간 김군의 주먹이 5~6차례 날아와 왼쪽 가슴을 가격했다. 당시 여러 학생들이 나를 잡고 있었으며 누군가 떨어진 안경을 주워주었다. 때린 김군의 멱살을 잡고 내 차에 태운 뒤 대학본부의 수위실로 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김교수가 신분을 밝힌 시점, 차를 빼도록 요구하는 과정에서의 언행, 폭행사실 등에 대해 전혀 어긋난 주장을 하고 있다. 이현관군과 마낙길군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대치상태가 돼서야 일방통행으로 잘못 들어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뒤로 물러서기엔 너무나 많이 거슬러올라와 버렸고 교수님의 차 옆엔 빈터(쓰레기장 입구)가 있었다. 그래서 비켜주겠거니 하고 생각을 하면서(그는 쓰레기장쪽으로 차를 비키라고 손가락질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았다) 두선이에게 ‘너는 먼저 서클룸에 올라가 철우를 데려오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두선이가 나가자 교수님이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여기서 김두선군은 이렇게 주장한다. “교수가 ‘너희들 학생이지 임마!’ 하면서 차를 빼라고 했다. 교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학생이지’하는 말에 ‘학생은 아닌 무엇’인 것 같긴 해서 마낙길에게 ‘야, 안되겠다. 차 빼라’고 말했다. 마낙길이 후진기어를 넣는 순간, 교수님이 달려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당황한 나는 뒤에서 교수님을 말리며 ‘이러지 말라. 차를 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뺨을 한대 갈긴 뒤 멱살을 잡고 수위실로 끌고가려 했다.”

 이군과 마군은 이 시점까지는 김교수가 학생이 아닌 것만 알았지 교수인지는 몰랐기 때문에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은 김교수에게 ‘반말조’로 항의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김교수는 ‘이 사람 미친 사람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인데, 학생들은 부인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미 교수와 학생들은 매우 격앙된 상태였다.

교무회의는 학생의 ‘폭행사실’ 인정
 구경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그중 일부는 ‘싸움’을 뜯어말리려 했다. 김교수는 김군의 멱살을 잡고 수위실로 끌고가려 하고 김군은 “이거 놓고 얘기하자”며 거칠게 저항했다. 김군은 “티셔츠와 런닝셔츠가 찢어지고 숨이 막혀 여러번 뿌리치다가 옆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멱살을 풀어 교수님 차를 타고 수위실로 갔으며 거시서 또 뺨을 한차례 얻어 맞았다”고 주장한다.

사건은 목격한 법학과의 한 학생은 당시의 상황을 “김교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몸싸움이 약간 벌어졌다”고 말한다. “김군이 거세게 저항을 하면서 손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김교수의 안경이 떨어졌다. 그러자 김교수가 ‘어, 학생이 교수를 치네. 너 같은 놈은 당장 퇴학시켜야 해’라고 말했다.” 김군등은 교수 신분을 이때 비로소 알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학본부 수위실에 김군을 데려다놓은 김교수는 병원으로 떠났다. 오후 3시30분에서 4시 사이의 일이었다. 당시 김교수의 부탁을 받은 수위들은 “김교수의 입안에서 피가 보였다. 그러나 교수가 맞았다고 하는데 김군이 매우 순응적인 태도여서 이상하긴 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는데 김군은 장학과에서 오라면 가고 다시 수위실로 와 한참이나 김교수를 기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학교에서 2㎞ 떨어진 삼선교의 ‘변종화외과의원’에 도착한 김교수는 ‘좌전흉부(왼쪽 앞가슴) 타박상, 전치1주’의 진단서를 떼었다. 병원측은 김교수가 입은 타박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누르면 아프고(압통) 부어오르며(종창) 어깨와 목으로 뻗치는(견인통) 일반적인 타박상인데 외력이 가해진 데 따른 것이다. 그 외력이란 김교수의 말대로 주먹으로 때린 것일 수도 있고 심한 몸싸움의 과정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고 밝힌다.

 김교수는 4일 후 이 병원을 한번 더 찾았다. 사건이 확대되고 여론이 들끓던 4월1일, 병원측에 따르면 김교수는 이날 “왼쪽 겨드랑이에 뒤늦게 나타난 멍(피하출혈)을 보여주러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성균관대 쪽에서 ‘멍자국’에 대한 확인 요청이 병원에 들어왔다. 이날 성균관대 교무회의는 김군의 처벌을 놓고 격론을 벌이다 병원측의 확인을 받은 뒤 오후 5시 회의를 속개하여 “폭행사실이 인정된다”며 ‘무기정학’결정을 내렸다.

 김교수는 진단서를 땐 목적을 “내가 피해를 입었고,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불리한 입장에 서지 않기 위한 판단에서였다”라고 말한다. ‘피해자 증명용’ 진단서를 가지고 수위실로 돌아온 김교수는 김군에게 신분을 재차 물었다. 김군이 “체육교육과 김두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김교수는 이때 김군이 자기 학교 학생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김군을 고소했을까. 김교수는 언론에 “학생들이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진정한 ‘사제관계’로 문제 풀었어야
 경찰서로 가기 위해 김군을 차에 태우려 했으나 다른 학생들의 제지를 받은 김교수는 오후 5시 전후에 혼자 동대문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리고 ㅅ일보 출입기자를 찾았다. “이런 일이 있는데 고소를 하려 하니 형사 한명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교수는 다음날 기자실에 들러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김교수는 지난 89년부터 잠시 ㅅ일보에서 객원논설위원을 맡은 적이 있으며, 미국유학을 떠나기 전 지난 76년부터 3년여 동안 ㅈ일보에서 일했던 기자 출신이다.

 기자실에 바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다음날 29일 조간신문에서부터 기사화됐다. 김교수의 말과 경찰조사를 근거로 한 이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

 “김교수가 차량통행 문제로 학생 3명과 시비 끝에 주먹 등으로 집단폭행당해 입안이 찢어지는 등 상처를 입었다. 학생들은 ‘정신병자 아니냐’며 욕설을 퍼부었으며 3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집단폭행했다. 때린 학생을 고소한 김교수는 ‘이러한 사제관계 풍토 속에서는 더 이상 강단에 설 의미가 없다’며 사직할 뜻을 밝혔다.”

 학원 안에서의 자동차 일방통행 문제가 폭행사건으로 비화한 것이 이번 사건이다. 이일은 우연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흥분이 앞선 보도태도가 정확한 사실을 생략한 부분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지성의 전당이 돼야 할 대학 구내에서 ‘사제관계’를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국민은 또 한번 사회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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