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反인종차별展’ 차별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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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작품 검열 및 누락으로 미술계 반발…경영진은 “이념논쟁의 장 아니다”

 전시회의 명칭 변조 및 일부 작품의 검열 등 예술의 전당측의 지나친 ‘몸사림’으로 야기된 ‘反아파르트헤이트(反분리주의)전’(3월21일~4월21일) 논란은 개막 후 보름이 지나도록 전시의 원상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미술계로 그 파문이 번지고 있다. 지구상의 마지막 인종차멸국가로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정책을 규탄하는 이 대규모 전시는 4월6일 현재 ‘국제미술전’(세계 유명작가 80인전)으로 그 명칭이 바뀐 가운데 주요 작품 5점을 비롯, 총 35점이 창고에 방치되는 홀대를 받고 있다.

 전시회 개막 후 이에 즉각 항의를 제기한 예술의 전당 노조는 지난 4일 사태의 진상을 아리는 백서를 발간했으며, 미술인들 역시 전시회의 복원을 촉구하는 성명을 준비중이다. 또한 이 전시의 모체인 파리의 ‘反아파르트헤이트세계미술가협회’ 본부도 이번 사태와 관련, 조사원을 한국에 파견할 것으로 알려져 사태추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제의 ‘反아파르트헤이트전’은 세계 34개국의 주요 작가 80명이 참여한 ‘인권주제전’. 회화 1백1점, 조각 11점을 포함해 총1백44점이 출품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백9점만이 전시되고 있다. 검열에 걸린 작품은 폴 레베이롤의 ‘껍질’, 볼프 보스텔의 ‘십자가에 못박힌 흑인’, 블라디미르 벨리코비치의 ‘장소, 형상공간X II', 패트릭 베토디에의 ‘한줌의 구슬 때문에’, 크레모니니의 ‘고문’ 등 모두 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유화작품들이다(70쪽 사진 참조). 이들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박신의씨는 “공교롭게도 이들은 참가자 중 가장 탁월한 작가군에 속하는 화가들로서 작가 자신의 정치적 의식이라는 측면 외에도 독창성있는 형식 운용의 차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 전시는 뜻을 같이 하는 저명 지식인·문필가들의 동참으로 더욱 이목을 끌고 있는데, 원도록에 실린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의 거봉 자크 데리다의 서문과 소설가 미셀 뷔토르, 시인 알렌 긴즈버그 등 10인의 특별기고 및 유엔反아파르트헤이트위원회 인권보고서, 미술평론가 성완경씨의 해설원고 등이 모두 제외된 허술한 도록이 발간돼 또 한차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출품 작가군을 보더라도 아르망, 소토, 비알라, 라우센버그, 리히텐슈타인 등 비교적 다양한 양식상의 성격을 지닌 거장들이 다수 참여, 작품의 폭과 작가의 지명도 양면에서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평상시 사회고발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작가로부터 팝아트 계열, 심지어 순수추상 계열까지 망라돼 있는데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조형물들은 제작자의 명성이나 재화 가치 등 작품 외적인 ‘잿밥’에 연연한 것이 아닌 생존투쟁의 산물로서 그 진실성이 더욱 돋보인다.”(《가나아트》 89년 3·4월호 ‘남아공의 인종차별과 미술활동’ 윤범모)

 83년 파리전을 시발로 영국 스웨덴 핀란드 등 10여개국을 거쳐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의 궁극적 종착지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는 날 자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세워질 反아파르트헤이트기념미술관. 출품작가들로부터 전 작품을 기증받기로 약속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웃 일본의 경우만 해도 무려 5백일 동안 근 2백개의 도시와 촌락에서 순회전시됐고 마지막에는 국회의사당에서 전시되기도 한 이 전시가 유달리 우리 땅에서 수난을 겪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술의 전당 위상 반영한 사건
 당초 이 전시를 유치한 사람은 예술의 전당 전 미술부장인 윤범모씨로, 지난해 말 ‘젊은 시각전’ 파동으로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 전시는 수차의 유산 위기 끝에 간신히 개막된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윤씨는 민중계열 작품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한 ‘젊은 시각전’에 당국이 ‘부당압력과 간섭’을 행사한 데 항의, 사퇴했다). 예술의 전당 노조는 “지난해 10월 이후 91년도 정식 사업계획으로 추진해오던 ‘反아파르트헤이트전’은 경영진측에서 여러 차례 취소시켜려 했으나 내부 직원들의 반발에 부딪혀 ‘열기는 열되 눈에 안 띄게 열자’한 것이 이번과 같은 사태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88년 개관 이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외풍’에 휘둘려온 예술의 전당의 위상 문제와 관련, 행정운용체계의 정상화와 전시회의 복원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이번 파문에 대해 경영진은 이렇다 할 공개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조경희 이사장은 일부 작품의 검열 및 누락에 대해 “이념이 앞선 작품이 몇 있었고 액자가 안된 작품도 일부 있어 솎아냈을 뿐”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또한 김수득 운영본부장도 “일부 작품을 전시하지 않은 것은 주최측 재량이며, 현재 걸린 작품들만으로도 전시 취지는 충분히 살아 있다고 본다. 예술의 전당은 모든 장르의 예술활동을 ‘균형있게’ 제공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이지 이념논쟁을 벌이는 곳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런데 예술의 전당측이 일부 작품의 누락 이유로 장소의 협소 등을 든 것과는 달리 미술관의 3층 전시실은 이 전시기간중 비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축제극장 등 일부 시설의 공사가 진행중인 예술의 전당은 국민의 준조세인 공익자금으로 설립됐다. 문화부 소관 법인체로서 사업비를 제외한 전 예산을 방송광고공사의 공익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또한 이사장·이사진에 대한 인사권이 문화부에 있는 만큼, 문화부의 ‘입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사진과 이를 거부하는 직원들과의 갈등이 개관 이후 줄곧 누적돼왔다.

 따라서 공공미술관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개관한 지 6개월이 채 안돼 빚어진 두 차례의 전시파동은 모두 ‘공공성’ 확보에 역부족을 느끼고 있는 예술의 전당의 현 위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성완경씨는 “과거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오랜 망명을 해야 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프랑코 사후 스페인에 민주정부가 수립된 뒤 명예롭게 귀환했던 것처럼 이 전시도 그와 유사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일종의 ‘망명순회전’이다”라고 규정한다. 또 “문화올림픽까지 치르고 창설된 문화부가 국제시대에 부응하는 문화발전10개년계획까지 세우고 있는 시점에서 빚어진 이번 사태는 우리 문화정책의 실상과 당국자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오점이다”라고 지적했다.

 ‘反아파르트헤이트전’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의 지난한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세계의 지식인·예술가들이 펼치는 인류애적 연대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유독 우리라 해서 일부 작품을 전시장에 내걸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전시축소’ 혐의를 씻고 국제적 문제거리로 비화할지도 모르는 예술가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는 전시의 원상복원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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