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女高音’ 모국서 성악 공부
  • 안병찬 편집국장 ()
  • 승인 199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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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명문대 출신 蘇春愛, 연세대 대학원 음악학과 정식 입학

 蘇春愛는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온 교포유학생이다. 올 29세. 그는 91학년도 전기 연세대학교대학원 음악학과(성악과정) 석사과정 입학전형에 응시하여 3월12일 합격 확인서를 받았다. 연변교포3세로 국적이 중화인민공화국인 그는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외국인 특별전형이 아니라 다른 일반학생들과 똑같이 아리아 2곡, 가곡 5곡을 불러 정식으로 합격했다. 3월 신학기부터 소춘애는 박성원 교수(테너·국립오페라단장)의 실기지도를 받고 있다.

 그는 연변조선족의 대표적인 고급간부·지식분자 가정 출신이다. 어머니 張吉子(54)는 延邊의원 약국 고급약제사, 오빠 仁旭은 延吉시 科技情報연구소 소장, 언니 春熙는 北京대학을 나온 재원이다. 소춘애 자신은 중국 최고의 명문 북경 中央民族學院 음악대학을 나온 女高音(소프라노)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노래에 능하고 춤을 잘추는’(能歌善舞) 민족으로 알려져 있고, 연변자치주는 ‘가무의 고향’(歌舞之鄕)으로 불린다.

 경력으로 보아 소춘애는 조선족자치주가 배출한 음악의 샛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연변에서 초등중학(初中)과 고등중학(高中)을 나왔다. 80년 연변 조선족자치주성립일인 9월3일 9·3음악경연대회에서 ‘고향기슭’을 불러 소춘애는 ‘여고음’ 1등을 차지하고, 이를 계기로 遼寧省가무단에 편입되었다.

 81년 그는 전국대학입시자격시험인 ‘大學同一考試’를 보고, 중국에서 북경대학·淸華대학과 함께 ‘終点大學’(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중앙민족학원에 진학했다. 85년 이 대학에서 문학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북경중앙음악학원교사가 되었고 중국 제일의 東邦歌舞團 공연에 가끔씩 특별 초청되기도 했다.

 그의 가정은 문화혁명기에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아버지 蘇東一(1928년생)은 항일전쟁 때 중공군 하얼빈 3지대 소속이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길림성 당위원회 규율검사위원이 되었다. 1959년에는 연길시 당규율검사위원회 서기가 된다. 당서기 버금가는 높은 자리였다.

 그러나 66년 毛澤東은 ‘5·16통지’를 내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타도대상이 되는 반혁명수정주의분자의 범위를 정했다. 당과 정부와 인민해방군 그리고 문화계 각 방면에 잠재하고 있는 자산계급의 대표자를 모두 반혁명수정주의분자로 규정하여 ‘타도의 불길’을 지른 사상투쟁이었다. 소동일은 반당수정주의분자로 분류되어 당학교에 5년 동안 감금당한다. 그곳에서 석방되자마자 노동개조를 위해 5·7간부학교에 투입되고, 5·7간부학교를 나온 후에는 ‘下放’되어 벽지의 東成인민공사로 귀양을 갔다. 반당분자의 가족이라 해서 남은 여섯 식구는 각각 위치가 다른 인민공사로 下放당해 6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연변 조선족 작가 리태수의 장편소설 《춘삼월》은 수정주의분자로 몰린 인물이 下放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소동일이 겪은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빗물이 질퍽한 강둔덕을 달구지가 굴러가고 있다. 달구지에는 책궤, 이불짐, 꾸러미, 식기 따위들이 아무렇게나 실려 있는데 이것이 뒤따르는 임자의 전부 가산이었다. ‘외국특무’의 감투를 쓰고 군중독재를 받던 그는 끌려나오자 인차 농촌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소동일은 74년 6월21일 병원도 없는 인민공사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때 소춘애는 12세의 소학생이었다.

 소춘애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연변가무단의 일원으로 89년 7월 서울올림픽 1주년 기념공연에 초청받아서였다. 이때 그는 서양음악의 세계로 문이 열려 있는 ‘할아버지 나라’의 ‘先進性’에 감탄하여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다니던 작년 4월 그는 마련해온 유학자금(미화 3천4백달러, 한화 1백80만원)을 뉴욕에서 온 교민2세에게 고스란히 사취당한다. 연세대 앞에 하숙집을 정한 것이 화근이었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교민2새 김모(31)씨의 말을 고스란히 믿고 등록금 등을 꾸어주었는데, 그는 어느날 뉴욕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자본주의 국가의 사기꾼에게 사회주의 국가의 ‘순진한 인민’이 속아넘어간 셈었다.

 박성원 교수는 소춘애의 음악적 재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소춘애의 목소리를 질기고도 강한 코르타르에 비유하면서 잘 다듬어주기만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리리코 스핀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리리코 스핀토란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뻗어나가는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를 말하는데 우리나라 성악가 중에는 ‘전성기때의 황영금’ 이외에는 뚜렷한 리리코 스핀토가 없다고 한다. 그는 또 중국 전통음악의 기초 위에 서양음악 기법을 익힌 후 소춘애가 개발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중국음악과 양악과의 만남을 우리 조선족 처녀가 완성하지 못하란 법은 없지요.” 목에서 나오는 생소리를 주로 쓰는 중국식 발성과 울림통을 통한 공명된 목소리를 쓰는 서양음악 발성은 그 기본적인 테크닉이 달라 요즘 소춘애는 발성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일주일 두 번인 레슨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안타깝다. 그러나 그는 스승복이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시간나는 대로 가르쳐 주겠다”고 박교수가 약속한 것이다.

 중국 문교부에서 정식 유학허가가 나지 않아 연세대 대학원에서 졸업장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하는 점도 그의 걱정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서양음악에 빨리 접근하기 위해서는 학교수업 외에도 비디오와 오디오를 통해 스테이지 매너 등을 익혀야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겨우 조그만 카세트 테이프레코더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괜찮은 오디오가 있었는데 유학자금을 사기당해 생활비 압박을 받고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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