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권력이동’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1.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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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제 외교무대 등장할 듯…실용적 인물로 권력기반 다져

지난 21일자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북한의 김정일이 조만간 외교무대 전면에 등장, 명실상부한 김일성 후계자 자리를 굳히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의 모리(森造一) 편집국장은 최근 김일성 주석 등 북한지도자들과 일련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노동당의 김용순 국제부장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김부장은 이 자리에서 현재 김정일이 “정치 경제 국방문화 외교에 걸친 모든 분야에서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후계자로서 국제사회에 공식 데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최근 김일성 주석은 앞으로 자신의 생일과 관련한 동상이나 기념물 건설 등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더 이상 진행시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올 들어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과 비교되기도 한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이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동안 김일성 주석이 80세, 김정일이 50세가 되는 92년에 제7차 당 대회가 열려 김정일에의 권력승계가 공식화할 것 이라는 관측들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 92년 권력승계론’에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전문가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현재 김정일이 명실상부한 제2인자가 돼 있는 상황에서 당 대회를 개최해 그에게 또 다른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는가 히는 의구심 때문이다.

북한연구소 소장 김창순씨는 김정일이 실질적인 2인자가 돼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당 총비서나 주석직 등 또 다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부담만 지우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김정일에의 권력승계는 마치 “왕조체제에서 황태자가 왕위를 계승협” 수령자리를 곧바로 승계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북한문제 전문가인 김남식씨는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변화와 남북한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7차 당 대회가 자동 연기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년에 승계가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현재 김정일이 북한의 명실상부한 2인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북한의 권력구조가 김정일 후계체제를 지지하는 세력들로 이미 구축돼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반대세력은 거의 모두 숙청
그렇다면 현재 북한 권력구조 내에서 김정일 지지 세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을 말하는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검정일 지지 세력이 김일성 지지 세력과 구분돼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즉 김일성 지지 세력이 곧 금정일 지지 세력이고 김정일지지 세력이 곧 김일성지지 세력이란 것이다.

이와같이 선을 긋기가 어려운 것은 북한의 권력 구조 내에서 김부자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미 거의 모두 숙청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 문가들은 ‘북한 반체제세력 존재론’이나 ‘반김정일 파’를 주장한 국내 일부 언론의 보도는 실체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일 지지 세력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그의 성장 과정이나 정치권력에의 등장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인물들을 중심으로 찾는 방법이 있다. 이와 관련, 외교안보연구원의 柳錫烈 교수부장은 《북한정책론》이라는 저서에서 김일성 지지 세력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세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노동당 조직이다. 김정일은 73년 9월당의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직을 맡은 후 같이 성장해 온 신진간부와 기술 관료들을 중심으로 추종세력을 구축해왔다.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의 결정적 기점이된 80년 10월의 6차 당 대회 당시 김정일은 당 중앙위원 수를 70년 11월의 5차 당 대회의 1백72명에서 2백48명으로 대폭 증원했는데 이때 등장한 신진간부의 수는 70.6% 에 이르렀다. 이들이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의 중요한 초석이 되고 있다고 한다. 또 현재 김정일이 이끌고 있는 10명의 당 중앙위 비서들은 유학 또는 해외여행을 통해 잘 훈련된 50대 중반의 당관료 출신들로, 이들 중 일부 신임비서들은 김 정일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에선 빨치산세대가 후견인
둘째는 북한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군 지도층이다.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후견인으로 삼아 군의 주요 지휘계통에 자신의 추종인물들을 배치하여 군부 내의 세력기반을 형성했다. 6차 당 대회 때는 16명으로 구성된 당 군사위원회에 김정일을 추종하는 만경대 혁명학원 출신을 충원시켜 새 세대의 진출을 꾀하였다. 현재 북한군 수뇌부에서 김정일계는 인민무력부 부부장 백학림(현 사회안전부장), 인민군 부참모총장 김강환,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윤치호 및 당 군사위 부장 김두남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5월 열린 최고인 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는 빨치산 세대 군 세력인 최광(인민군 총참모장)과 김철만을 승진시켜 군부 내 후견세력을 두텁게 하기도 했다.

세 번째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다. 만경대혁명 학원은 47년 10월12일 혁명가들의 유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됐으나 이후 직업혁명가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됐다. 김정일은 이 학원의 1기생으로 53년 입학했는데 그 후 현재까지 약 2천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원 졸업생들은 최우선적으로 김일성대학이나 주요 기관의 고급간부로 등용되고 있다. 특히 6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 중에는 이 학원 출신자들이 많아 김정일의 권력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고 있다.

네 번째는 3대혁명소조원들이다. 이 세력은 김정일의 등장과 함께 그와 행동의 궤를 같이해 실제적으로는 김정일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전례 없이 사회적 비중과 지위가 높아진 가운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지난해 5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때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고 일거에 당서열 10위의 정치국 정위원으로 승진한 한성룡을 들 수 있다. 그는 김정일 측근으로는 유일한 중공업 전문가로 혁명 1세대 세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지난해 남북 고위급회담 때 연형묵 총리를 수행하며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임춘길 조국 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 최봉춘 책임 연락관, 북한 ·일본 수교교섭 당시 실무책임자였던 최수길 대성은행 고문 등도 3대혁명소조 출신 인사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정책의 두 기둥 허담 -김영남
이들 인물 중 각 부분의 실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부에서는 조선노동당내 중앙군사위원회와 행정부 내 국방위원회에 모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을 일단 실세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최광 총참모장, 이을설 호위 총국장겸 수도방위사령관, 주도일 제2군단장 등이 있다.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현재 북한권력 서열 3위로, 일부에서는 그가 김일성 사망이후 김정일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최광 김철만 등 혁명 1세대 군 원로와 함께 김정일 체제에 대한 강력 한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오극렬 전 총참모장(현 당 비서), 김두남 대장, 김강환 중장(인민군 부총참모총장)  등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군부 내 김정일 인맥을 대표한다.

외교정책에서는 주로 대남관계를 담당하는 허담 조평통 위원장과 김영남 외교부장이 커다란 두 축이다. 최근 허담 위원장은 신병관계로 실무적인 업무는 거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그가 조평통 위원장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한 관측통에 따르면 이는 사실무근이라고 한다. 이 두 사람 외에 지난해 최고인민회의 때 통일정책심의회 위원장이 된 윤기복은 대남정책과 관련하여, 김용순 당 국제부장은 북 한 ·일본 수교교섭과 관련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해 말에는 김정일이 외교정책 실 무진을 재편하면서 대소 관계는 김영남, 대일관계는 김용순, 대남 관계는 윤기복에게 중책을 맡겼다는 보도도 있었다.

경제정책 실무 팀으로는 정무원 쪽의 인물과 당 비서국 쪽의 인물이 있다. 당 쪽에서는 지난번 고위급회담 대표로 남한에온 연형묵 총리를 들 수 있다. 그는 74년 3대혁명소조 중앙지도부 책임자를 맡아 김정일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한에서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기술관료 세대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밖에 국가 계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영림 부총리, 홍성남 부총리, 여성으로서 경공업 분야의 전문가인 김복신 부총리, 대외경제분야 전문가인 김달현 부총리(48~49 면 참조) 등이 있다. 당 비서 국에서는 경제담당인 전병호 비서(정치국 및 국방위위원 겸임), 기계공업 분야 전문가인 한성룡 비서(정치국위원 겸 임), 농업문제 전문가인 서관희 비서 등이 있다.

이들 김정일 후계체제 지지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구축되기 시작한 과정은 김정일의 정치적 성장 과정 및 북한 권력구조내의 세대교체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김정일은 41년 2월16일 소련의 사마르칸트에서 김일성과 그의 전처인 김정숙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48년 9월 간부 자녀들만 다니는 평양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고, 6·25때는 중국의 길림학원에 진학했다. 53년 잠시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을 다니다가 동독의 항공군관학교에 유학했고, 이어 63년 8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 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이 북한 권력체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64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면서부터다. 그는 조직지도부 지도원에서 출발하여 69년 조직지도부 부부장, 70년에는 노동당 문화예술부장으로 승진했다. 그가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72년 12월 열린 당 중앙 위원회 비공개회의에서였다고 한다. 이후 73년 9월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그 는 당권의 핵심인 당 조직 및 선전선동담당비서로 등용됐다. 특히 이해 2월 결성된 3대혁명소조운동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후계체제 구축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70년대 초 북한에 3대혁명소조운동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김정일 후계체제의 구축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당시 북한은 권력의 중심축인 노동당의 비대화로 인해 효율적인 권력체제 구축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70년대 초 노동당 당원 수는 약 2백만 명으로, 당시 북한인구가 1천6백만이었으므로 국민 8명 중 1명이 당원 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상의하달의 효율적 당 운영이 불가능 했다.

또한 북한 사회주의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기존 당 간부의 세대교체가 절실히 필요했다. 즉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해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빨치산 투쟁의 경험보다는 각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춘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71년 6월 김일성은 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6차 대회 때 “혁명의 과녁은 변하지 않았는데 세대는 바뀌어 해방 후 세대들이 나라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라며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김정일의 ‘친위대’ 3대혁명소조
이와 같은 배경 속에 등장한 것이 3대혁명소조운동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73년 2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결성됐다. 이들은 대학생 ·당 ·정부기관 등으로부터 차출 된 젊은이들로 10~20명씩의 소조를 구성하여 당 ·정부 ·군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 파견됐다. 즉 김일성 의 분신으로서, 김일성 대신 김정일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현지지도’를 함으로써 “전사회를주체사상으로 일체화”하고 간부의 세대교체를 이뤄온 것이다.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의 결정적인 기점이 된 것은 80년 10월의 제6차 당 대회이다. 이 대회를 통해 그는 당 상무위원회 4위(5명 중), 당 비서국 2위, 당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돼 최초로 그가 김일성의 후계자임을 대내외에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6차 당 대회는 70년 11월의 5차 당 대회와 비교해 권력구조 면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빨치산투쟁 동료들인 혁명 1세대가 점차 약화되고, 혁명2세대인 기술관료 들이나 혁명 3세대인 김정일 세대가 두드러지게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80년대의 전 과정을 통해 김정일 후계체제의 강화와 간부진의 세대교체는 일관되게 추진됐다.

김정일의 권력은 83년 4월 이후 그가 오진우 인민무력 부장을 제치고 당서열 2위로 부상하면서 당 · 정사업을 전반적으로 지도하는 명실상부한 후계자로서 위치를 굳히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에 따라 86년 김일성은 “북한에서 후계자 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됐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5월 열린 제9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는 김정일이 정부 쪽에 신설된 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이 됨으로써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했다. 6차 당 대회 이 후 권력구조내의 세대교체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당의 권력중추인 정치국은 6차 당 대회 때 19명에서 90년 12월 현재 15명으로 줄었는데 혁명 1세대의 비율이 53%에서 33%(5명)로 크게 낮아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거의가 경제 ·기술 관료로 채워져 있다.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가면 혁명 1세대의 군 출신 김철만을 제외한 9명 전원이 경제 ·기술관료 출신이다. 또 당사업을 일상적으로 조직 지도하는 최고집행기관인 비서 국은 12명의 비서 모두 경제 ·기술 관료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추세를 더욱 명확히 보여 주는 것이 ‘헌법상’의 최고기관으로 돼 있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의 성분비율이다. 80년대 들어와 최고인민회의는 7기(82년 4월) 8기(86년 12월) 9기(90년 5월) 등 모두 3차례 열렸다. 이 사이 노동자 ·협동농장원의 성분비율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박사 교수 과학자 기술자 등 지식인의 비율이 크게 상승하고 있다. 이는 학력분포에서 대졸 자가 증가하는 현상으로도 확인된다(47변 표 참조).

핵심권력층의 변화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군부의 비중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80년 6차 당 대회 때 군 출신 인사는 정치국 위원 19명 중 7명이었으나 현재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최광 총참모장 밖에 없다. 정치국 후보위원인 김철만을 포함해 권략 수뇌부에 군 출신 인사는 3명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세대 밀려나고 기술 관료층 세력 확대
이와 같은 권력구조 교체과정은 김정일이 80년 6차 당 대회 이후 실질적인 2인자로서 인사를 장악해 왔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방향이 권력 구조 내에서 기술 관료층과 지식인 계층의 세력 확대하는 형태로 진행돼왔다는 것은 결국 김정일 체제하에서 북한의 대내외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암시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현재 나라 안팎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김정일 체제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응해나갈 것인가.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공산당 1당 독재의 포기, 다당제도입, 시장경제원리의 도입 등 의 길을 택할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전문가들의 견해는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 체제가 혼란상을 보이는 상황이 오지 않는 한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소련 및 사회주의권의 변화에 대해서도 북한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발전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식 사회주의’론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의 내용 중 특히 수령 론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수령 ·당 ·인민대중의 삼위일체를 ‘혁명의 주체’로 설정하여 이들 간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고 발전시킬 때 현재의 역경을 이겨내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논리인 셈이다. 따라서 이런 논리에 따르면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변화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당의 권력독점의 강화, 사회주의 경제원칙의 고수라는 방향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70년대 초 한반도 주변정세가 격동을 보였을 때 북한이 보인 대응방식을 검토해 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주변정세는 미국과 중국의 접근, 남북 대화 등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었는데 남한이 유신체제리는 강권체제의 구축으로 이에 대응했던 것처럼, 북한은 3대혁명소조운동과 ‘전사회의 주체 사상화’라는 내부통제의 강화로 이에 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부체제와 달리 대외정책의 측면에서 북한은 이미 지난해 남북 고위급회담, 북한 ·일본 수교교섭 등에서 나타났듯 실리적이고 탄력성 있는 대응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외적 고립에서 빠져나오고 경제악화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 때문이다. 올 들어서는 기존의 고려연방 제안이나 유엔정책에 대한 수정 가능성이 제시되는 등 탄력성의 폭이 더욱 확대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전술로 볼 수도 있겠으나 현재 김정일 체제를 구축 하고 있는 주요세력들이 경제 ·기술 관료층 또는 지식인 계층 등 좀더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연결해 보면 더욱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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