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 ‘새풍속’ 부모욕심 탓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5.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입보장 못하는 과외 대신 확실한 유학을” 알선업체 감언이설



최근 검찰은 중고생해외유학 사기사건의 피의자인 여배우 최유리(28)씨 등 4명의 유학 알선업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고 경찰에 재수사를 지시한 바 있다. 여권법 적용 여부를 둘러싸고 빚어진 검 ·경 양측의 이 같은 견해 차이는 근본적으로 교육부와 외무부 두 관련 부처간의 관계법령 상충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기유학 알선업체들의 ‘불법 ·사기’를 코앞에 두고도 이도저도 못하는 당국의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교육부의 현행 유학관련법은 원칙적으로 중고생의 해외유학을 금지하고 있으나 예체능계 특기자 중 교육부가 지정한 대회의 입상자에게는 이를 허용하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반면 89년 이후 해외여행의 자유화에 따라 18세 미만인 사람은 누구든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교육부 관련법상 엄연한 ‘불법’이 실무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합법’으로 성행하고 있는 것 이다.

“수속대행료 ·부르는 게 값”
더욱이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듯 일부 알선업체들의 경우 미대사관이 학생비자(F-1비자)를 발급하는데도 발급이 안 된다 속이고 웃돈을 요구하거나, 혹은 발급이 손쉬운 관광비자(B-2비자)를 얻어주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일단 관광 비자를 얻어 출국한 뒤 미국 현지에서 이를 학생비자로 전환, 눌러앉는 방식의 편법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무지를 노린 업자들은 법적 규정을 들먹이거나 학생의 성적이 나쁘다는 약점을 빌미로 70만원으로 약정된 수속 대행료를 턱없이 올려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되는 것을 되게끔”하는 만큼 조기유학의 알선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어서 업자들은 수속 대행료 조로 최고 1천만 원까지 불렀다고 하는데 서울 강남권에서 가장 큰 유학원 가운데 하나인 코리아 아카데미의 경우는 ‘얼굴마담’격인 이사장 최유리의 홍보효과가 주효, 이 일대 학부모들에게 “비싸도 확실하다”는 높은 ‘공신력’을 얻고 있었다 한다.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해 코리아아카데미측은 “1천만 원 요구 설은 학비선납에서 빚어진 오해”라고 해명하면서 “문제가 된 90년 7월 출국자 1백4명으로부터 받은 금액은 1개월 기간의 여름학교 연수비 및 기숙사 비를 포함, 1인당 2백97만원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또 보도된 바와 달리 사건 발발 후 최이사장이 미국으로 도피한 적이 없으며 광고촬영 관계로 지난 5일 도일했다가 8일 귀국, 10일 현재 변호사 선엄중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중고생의 유학대상국은 미국 호주 영국 순으로 현재 90% 이상이 미국을 택하고 있다. 비자 발급 처인 미국 ·영국대사 관측의 함구로 중고생유학의 정확한 수치 파악은 힘들지만 미국시장을 호주시장의 약 10배로 볼 때 미국유학이 적어도 연간 3천명 선을 넘어서지 않았겠느냐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호주유학을 위한 비자발급처인 호주교육원은 89 · 90년 중고생유학자수를 각 340 · 320명으로 밝히고 있다. 한편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현재 미국내 한국유학생 총수 는 약 2만 명으로 이 가운데 중고생유학자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다).

일례로 전교생 2천명 수준인 서울 압구정동 구정중학교의 경우 90학년도 총 자퇴자수는 52명으로 이 가운데 약 30명 정도가 이민 등의 허위목적으로 서류를 발급받아 해외유학을 떠난 것으로 학교 측은 밝히고 있다. 인근 신구중의 경우도 지난해 자퇴자의 절반 수준인 15명 정도가 해외유학을 떠났다고 밝혔는데 청담중 신사중 언북중 등 압구정동 일원의 중학교가 모두 이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 말한다. 한편 전교생 8백 명인 구정고등학교의 경우는 90학 년도 총 자퇴자의 3분의 1 수준인 30명이 해외유학을 떠났다고 밝혔는데 이웃 현대 고교의 유학률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귀띔한다.

업계에서 전하는 중고생유학의 ‘적기’는 중3 ·고1 무렵이며 성수기는 학교생활에의 적응 여부가 판별되는 9월 ~11월, 개개인의 속사정이야 어쨌든 대한민국 교육제도 아래서 실패한 학생이 태반이다. 대학입학에 비관적인 중하위권 성적의 학생을 비롯해 학교 측으로부터 자퇴요구를 받는 등 부모가 자녀의 교우관계를 정리하려는 경우나 친척 등의 연고가 있고 미국의 교육 제를 선망하는 경우, 드물게는 재능을 살리고 싶은 이유에서 조기유학을 선택한다.

그러나 압구정동에서 몇 년째 유학 원을 경영하고 있는 한 업자는 최근 중고생유학이 확산되면서 “연 ·고대에 못 넣을 바에야 일찌감치 외국에 내보내 대학졸업장을 따게 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부모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한다. 이 같은 현상은 중고생유학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구정중학교 ·현대고등학교를 비롯, 이른바 8학군 ‘신명문’들에서 쉽게 확인된다.

“조기유학이 흔히는 하위권 학생의 도피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상위그룹 부모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교에서 수위를 다투던 학생이었는데도 국내 대학은 성에 안찬다며 부모가 유학을 보낸 예도 있었다.”

섣부른 규제는 업자 장삿속만 부풀릴지도
지난 몇 해 동안 숱한 유학 사례를 보아온 구정중학교의 정관희 교사는 근자의 조기 유학 붐을 한마디로 ‘부모욕심’ 이라고 꼬집는다. 연간 수천만 원의 과외비를 쳐들이고도 합격의 보장 없이 불안에 떠는 대신 지금 곧 확실한 ‘투자’를 하라는 알선업체들의 권유는 그럴싸하다.

여기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편법도 서슴지 않겠다는 일부 부유층의 빗나간 교육열이 바로 강남판 조기유학의 새 풍속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요즘 과외시세로 ‘웬만한’ 선생을 붙이려면 과목당 1백만 원씩 국영수 세 과목에 월 3백만 원. 1년 치로 셈하면 3천6백만 원 꼴인데 미국 중고등학교에 유학 보낼 경우 학비와 생활비 합쳐 1 년에 1천만 원~1천5백만 원(1만2천 달러~2만 달러)이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알선업체들의 이 같은 감언이설은 학생 개인의 성적이나 성격 등에 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업체 측이 정해놓은 학교로 일방적인 ‘떠넘기기식’ 입학을 시킨다는 데 문제가 있다. 3류 학교건 곧 문을 닫아야 할 ‘거지학교’건 입학허가원만 얻어지면 두부모 자르듯 학생들을 배정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언어장애로 인한 기초학습력 부족이나 향수병 등으로 인한 많은 실패사례에도 불구하고 중고생의 유학을 부정적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최근 각 기업체의 해외지사가 늘어나면서 외국에서 성장한 지사 근무자의 자녀들이 귀국 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해외로 나기는 사례가 빈번하며, 조기유학의 성공사례가 높은 예능계 전공자 등 영재교육의 측면에서도 해외유학은 긍정적 일면을 갖고 있다.

이번에 여배우 ‘사기유학알선 사건’이 터지자 관련업계와 문교당국, 일선학교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속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고생의 유학자체를 전면 규제해야 되겠느냐는 물음에는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인 듯하다.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막아서도 안된다”는 여론이 높다. 대입 수험생의 4분의 3을 낙방시키는 현행 교육제도의 모순이 시정되지 않는 한 조기유학은 꾸준한 수요로 불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섣부른 규제는 오히려 업자들의 장삿속만 부풀리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고생유학 문제는 크게는 ‘교육제도의 개혁’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작게는 정부 부처간의 상충된 관련법규를 정비해 당국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제도적 지원을 병행함으로써 선의 의 피해를 막아야 할 시점으로 얹어진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