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 야도 아닌 시민대표”
  • 박중환 정치부 차장 ()
  • 승인 1991.05.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천시의원(전 YH노조지부장) 崔順永

  경기도 부천시의회 의원 崔順永(39) 아무래도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직함이다. 아직까지는 ‘ YH노동조합 지부장이었던’ 최순영이라고 말해야 그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이름은 유난히 무덥고 길었던 79년 여름, 여성노동운동의 기수로 태어난다. 그해 8월9일 오전 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 여성노조원 1백86명이 신민당 중앙당사를 기습점거한 이른바 YH 사태는, 79년 가을 朴正熙 공화국 18년이 무너지도록 재촉했다. 그는 박대통령이 죽자 그해 연말 석방됐으나, 세인의 기억에서 이내 잊혀진다. 최씨는 80년 이후 여성노조에 분규가 생기면 으레 그 자리의 한쪽에 서 있다. 그 가운데서도 부천의 공장지대에 접한 달동네에서 탁아소를 어렵게 운영해온다. 그 이름이 또다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지난 3월26일 기초의회선거 때이다. 그의 당선은 여성이라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재야 ‘골수’가 제도권내인 지방의회선거에 참여했다는 점 과,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 ·야 ·재야가 함께 추천한 후보였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79년 ‘그때’ 임신 6개월짜리 새 생명이 국민학교 6학년의 재롱둥이로 건강하게 자라, 그는 어엿한 어머니가 돼 있다. 그 아이 는 엄마가 걸어온 ‘이해하기 힘든’ 길의 뜻을 천연스럽게 캐묻곤 한단다. 그때마다 그의 치열한 운동논리를 재롱둥이의 천진함을 통해 변증시키며 ‘작은 역사 운동’을 스스로 벌이고 있는 듯하다. 그의 풀뿌리 정치를 기대해 볼 만한 구석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지방의회에서 어떤 부분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활동할 것입니까. 노동 분야인가요?
부천시의회 의석은 45석인데 이중 여성이 5명입니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은 저 말고 한 사람 더 있지요. 중앙정치와 달리 지방자치는 현실적으로 지역주민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같이 일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겠다는 생각에서 출마를 결심 했습니다. 특히 탁아소를 하면서 더 크게 느꼈어요.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작년엔가 탁아사업을 지원하라는 보사부 지시가 내려와 부천시가 조사를 했어요. 부천에는 이런 탁아소가 4곳이 있습니다. 저와 친한 부천시 공무원이 지원해줄 탁아소를 2곳만 지정해야 하는데, 조사를 해보니 제가 운영하는 ‘튼튼이 아가방’을 지정해주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가 그렇게 보고해도 위에서 안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친구는 제 과거를 몰랐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그게 어디로 결정됐느냐 하면, 4곳 중 제일 부유한 탁아소로 결정 됐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지방 자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사실 저는 조례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선거운동하면서 알았어요. 앞으로 가장 중요한 주민의 권리가 개선될 수 있게 해야겠고, 예산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회에서 자기 의견을 지지해주는 의원을 많이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원과 마찬가지로 지방의회의원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력인데.
저도 그점에 관해 굉장히 고민이 많습니다. 처음에 출마를 망설인 것도 그러한 힘이 제게 있는지  우리의 생각을 과연 실현 시킬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꺼번에 다 이루기는 힘들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저렇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과연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어려운 문제입니다. 요즘 부천시민단체가 시의정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자기네 구역 의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회원 들이 감시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거운동 때 내놓았던 공약 을 모두 모아놓았습니다. 함께 활동할 생각입니다. 저도 감시를 당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게 좋습니다. 저 자신도 못하면 혼도 나고 그래야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동안 주장해온 노동운동논리를 합법적인 자리에서 논의하는데 제약을 받아왔을 것 같습니다. 시 의회에 나가면 공개적으로 이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자신의 논리가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생각합니까?
글쎄요. 의원 가운데 기업주 출신이 많아 어렵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시민운동과는 성격이 또 다른 것이니까요. 노동문제에 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겠지요. 가령 조례를 제정할 때, 잘은 모르겠으나 크게 부딪힐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노사문제가 걸리면 분명히 제가 현장에 가야 할 텐데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한 대립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의원들을 끊임없이 만나서 설득해야지요.

부천은 범야권 연합공천 움직임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4분이 그렇게 당선됐다는데.
저는 여 ·야 ·재야의 연합추천 형태였고 다른 3명은 모두 야당과 재야의 연합추천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도 야도 아니고 시민의 대표라고 생각해요. 어느 한쪽의 지원만을 받는 다면 혹시 부담감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민자당 쪽에서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1등으로 당선됐습니다.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보니까, 아휴 정말 치사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게 바로 정치인가 싶어 괜히 나섰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6월 광역의회 의원선거에서도 야권의 연합공천이 가능하리라 봅니까?
논의 중입니다. 이 지역에는 말이 재야지 몇 사람 되지 않아요. 그렇더라도 일단은 연합해서 단일후보를 내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광역의회선거에서는 굉장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완전히 합의는 안 되더라도 이런 식은 가능할 듯합니다. 야당끼리 합의해서 후보를 지역별로 안배하는 정도는….

 YH 무역노조에서 출발해 그동안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을 거쳐 이제 시의회에까지 진출했는데, 지방의회 참여는 운동의 한계인지, 아니면 극복하는 한 단계인지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제가 제도권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운동권에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앙정치와는 다른 지방자치의 특색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지역에서 참여할 수 있으면 참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지역조직은 다양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계 도 많을 것입니다.

부천의 노동운동은 활발한가요?
제가 부천여성노동자회를 시작한 것이 86년부터였고, 그전에는 서울에서 했습니다. 살기는 8년 살았지만 이 지역에서 활동은 많이 안한 셈입니다. 70년대에는 민주노조 대부분이 여성사업장에 설립 됐습니다. 반도상사 청계피복 등등. 당시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산업발전 과정에서 가장 큰 일을 하면서도 착취를 많이 당했습니다. YH사태 당시만 해도 여성노동자들이 정말 잘 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직업적 운동가로 계속 남아 있는 여 성은 별로 많지 않더군요.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계속 활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때 2백여 명이 같이 활동을 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저하고 우리 사무장 둘뿐입니다. 80년대 이후 중공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노동운동도 주로 남성위주가 됐습니다. 남자들이 하니까 힘도 세고 해서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여성운동가의 배출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노동자 자신만으로는 안 되고 가족과 함께 싸워야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했던 여성들이 주축이 돼서 한국여성노동자회를 87년 발족 했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가족투쟁위원회 등 가족조직을 꾸리고, 여성들을 교육해서 지속적으로 현장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지긋지긋한 현실을 결혼을 통해 벗어나려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보니 딸린 식구도 있고 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정말 살아가기 힘드니까 다시 현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다 애를 놔둘 곳이 없어 방에다 가두어 놓고 출근한 뒤 불이 나서 모두 죽은 사건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불행을 답습하고 물려줘선 안 됩니다. 공장 혹은 공단 내에 탁아소를 만들어 안전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성문제도, 근로조건문제도 해결됩니다.

탁아소 운영을 지역운동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노동운동 의 하나로 봐야 하는지요?
애초에는 노동운동 차원에서 시작했습니다. 84년 서울 구로공단과 인접한 철산리에서 시작했어요. 한 4년 뒤 이곳으로 왔습니다.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모든 것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이곳으로 왔지요.

신민당사를 점거했을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애기는 잘 큽니까?
예, 건강하고…. 국민학교 6학년이에요. 아이를 키우면서 지역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공부도 잘해요?
우리 아이는 학원에 한번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국민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더니 아이가 “엄마 나는 한글을 몰라서 어떻게 해”하더군요. 그래서 “한글을 가르쳐주는 데가 바로 학교인데 왜 걱정을 하느냐”고 그랬지요. 사실 애가 학교에서 적응을 할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가령 저는 경찰이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는 학교에서 경찰이 좋다고 배우지 않겠습니까. 이런 모순을 어떻게 풀 지 걱정 했습니다. 그런데 애한테 숨기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제가 경찰서를 방문할 때도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가 엄마를 때리는 경찰은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주곤 했습니다. 엄마는 왜 대학을 못 갔느냐고 물으면,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합니다(최씨는 강원도 강릉 농사꾼 집안에서 3남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70년 서울로 와 YH무역에 입사, 동생의 학비를 보태면서 열심히 살았다. 흑자기업이 경영진의 돈 빼돌리기로 폐업위기에 처하자 75년 노동조합을 결성, 지부장을 맡아오다 YH사건을 주도했다). 아빠는 대학을 나와 공부를 많이 했지만 노동운동에 관해서는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전문가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자연스럽게 적응해가더군요. 요즘에는 빈민이나 거지들을 보면서 왜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지 이해한다는 눈치예요. 언젠가는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엄마, 노동자들은 참 바보야. 사장은 한명이고 노동자들은 저렇게 많은데 왜 못 이겨”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바로 그거다. 노동자들이 흩어져 있어서 그렇다. 엄마는 그래서 노동운동을 한다”고 말해줬습니다. 어떤 때는 “엄마 나도 공부하기 싫은데 노동운동이나 할까”라고 그래요. 그러면 저는 “공부를 못 하면 노동운동도 못한다”고 말해줍니다. 누가 우리 애기한테 공부 잘하냐고 물으면 너무 자연스럽게 “못해요” 그렇습니다. 좀 크니까 스스로 속상해 하면서 노력을 하더군요.

우스갯소리 같습니다만, 애를 가졌을 때 농성을 해서 태교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겠습니까?
여담이지만 당시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수사관이 “태교가 얼마나 중요한데 임신을 하고 이럴 수 있느냐. 아이가 투쟁, 투쟁하면서 나올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내 아이가 태어나서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얼마나 순진하고 무서움을 타는지.

아이에게도 노동운동을 시킬 생각인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말 하지 않습니다.

요즘도 그때 노조원들을 만나나요?
신민당사에 들어간 사람은 1백86명이었습니다. 현재 연락이 되는 사람은 1백 명가량 됩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金京淑(당시 투신자살한 YH 노조원) 추도식 때나 모입니다. 못 오면 꼭 전화연락을 합니다. 생활형편은 어떤지 몰라도 사는 모습은 건강하고, 옛날에 자기가 ‘공순이’였고 운동했다는 것도 남편에게 당당히 이야기 하며 산다고 해요.

노동운동은 어떤 가치를 지니며 무엇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현장에서 싸워왔으니 남다른 철학이라도 있을텐데.
노동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이 되어왔습니다(그는 이 질문에 관해 일반적인 답만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노동운동 노선에 따라 서로 견해가 달라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학교를 졸업한 여성과 대학을 나온 남성의 결혼이란 흔치 않습니다.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 결혼을 하게 됐나요?
남편은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EYC 회장으로 기독교청년학생운동을 했다고 해요. 사실은 그 정도밖에 몰라요. 지금 부천 YMCA 총무로 있습니다. 76년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노동조합 간부교육을 받을 때, 남편이 학생대표로 와서 만났지요. 제 벌이로 남동생 학비를 대주어야 했기 때문에 저는 별로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79년 결혼했지요.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