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평화상까지 노린 ‘일본 우익의 수령’ 사사카와
  • 도쿄 ·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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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전범이 보트경주로 치부, 세계 곳곳에 재단 세우고 평화주의자 자처



 일본선박진흥회 회장 사사카와 료이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파시스트’. 74년《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자기 자신을 소개한 말이다. 그가 이 인터뷰에서 돈이 많다고 자랑한 것은, 일본의 모터보트 경주계를 움직여 연간 1천4백억엔(약 1조원)을 주무르고 있다는 말이다.

 사사카와는 일본이 패전한 직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그가 오늘의 ‘사사카와 왕국’을 구축하게 된 것은 이 형무소 시절 《라이크》에 실린 모터보트 경기 사진을 보면서였다.

 스스로 ‘스가모 정치대학’을 졸업했다고 말하는 사사카와는 자신의 검은 인맥을 총동원해 59년 선박진흥회를 설립했다. ‘황금알을 낳은 거위’ 모터보트 경기의 공영 도박화에 성공한 것이다. 현재 선박진흥회 산하 전국 24개 경주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자그마치 연 2조엔. 이중 75%가 상금으로 환불되고, 나머지 25%는 지방자치 단체 등에 배분한다. 사사카와가 30여 년간 회장직을 독점하고 있는 선박진흥회는 그 중 3.3%를 수수료로 징구하고 있다. 이 수수료 총액은 연간 약 7백억엔(5천억원)에 이른다.

자칭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파시스트’
 ‘사사카와 왕국’의 기틀인 선박진흥회의 가장 큰 특징은 경마·경륜 등 다른 공영 도박단체와는 달리 중앙 관청의 간섭이 거의 없는 재단법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선박진흥회는 사실상 사사카와의 개인 단체 성격이 강하다. ‘갬블의 제왕’ 사사카와는 《타임》에 자신을 파시스트로 소개한 것처럼 ‘우익의 거두’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사카와는 젊은 시절부터 일본의 우익 운동에 심취, 25세에 國防社를 결성했다. 30년 이 단체를 모체로 사사카와는 國粹大衆黨이란 정당을 창당한다. 무솔리니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그는 1만2천명 전당원에게 파시스트 복장인 검은색 셔츠와 국방복을 착용케 하여 눈길을 끌었다.

 사사카와는 또 전후 ‘일본 정계의 검은 배경’으로 군림한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가 전쟁중 중국에 설치한 이른바 ‘고다마 기관’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다마 기관은 일본 해군이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설립한 비밀 부대이지만, 실제로는 약탈과 마약 거래·첩보 수집이 주임무였다. 사사카와는 중국 침약의 첨병인 고다마 기관을 적극 후원했는데, 이 때 ‘동양의 마타하리’라 불리던 청국의 왕녀 가와지마 요시코(川島芳子)와 염문을 뿌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일본 패전후 사사카와는 ‘A급 전범’ 용의로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스스로 전범임을 자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사사카와는 천황제 존속·유지를 위해 스스로 A급 전범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연합국을 비난하는 가두 연설을 감행했다. 이 때 그는 ‘일본이 조선·만주를 침략하게 된 것은 연합국측에 그 원인이 있다. 조선·만주·대만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의해 생활과 문화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미 점령군사령부의 한 보고서는 그 당시의 사사카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사사카와는 일본의 정치 장래에 잠재적 위험인물이다. 그는 20여 년간에 걸쳐 일본의 침략과 군국화 배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해왔다. 그는 현재 재산가이기는 하지만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을 인물이다.”

 보고서의 지적대로 사사카와는 출감후 정치와는 일단 손을 끊고 축재 활동에 전념했다. 선박진흥회를 사유화하면서 본격적인 축재를 이룰 수 있었던 최대 무기는 우익 전범이라는 그의 이력이었다. 그는 또 야쿠자 조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 구미(山口組)’의 조장 다오카와가 바로 그의 술친구이기도 했다. 이들을 등에 업고 사사카와는 주식투기를 벌여 엄청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사카와는 현재 4백여개 단체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른바 ‘일본의 수령’이다. 이 단체에 관련된 인원만해도 줄잡아 3천만명. 그래서 사사카와는 일본 인구의 4분의 1을 호령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10년간 4천만달러 기부
 그렇다고 사사카와가 출감후 우익 활동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사사카와는 패전후 ‘국수대중당’을 ‘전국근로자 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A급 전범 처형자에 대한 추도식을 주관해 왔다.

 사사카와는 또 반공 운동에도 뛰어들어 ‘아시아 반공연맹’ ‘세계 반공연맹’을 주관해 왔다. 60년대에는 통일교가 창설한 ‘국제승공연합’의 회장을 잠시 역임했는데 통일교가 일본에 진출한 63년 통일협회 일본지부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사사카와가 반공 운동에서 손을 떼고 갑자기 해외 활동에 주력하게 된 것은 70년대부터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보트 경기에서 자동적으로 들어오는 돈의 사용 대상을 바꾼 것이다.

 사사카와는 이를 위해 연간 1조원에 달하는 선박진흥회 분배금을 세계 곳곳에 뿌려왔다. 한 예로 75년부터 천연두 박멸과 한센병 연구 지원 명목으로 선박진흥회가 세계보건기구(WHO)에 기부한 금액은 10년간 4천5백만달러에 달한다. 이러한 공로로 세계보건기구는 본부 건물에 사사카와의 동상을 세워주고 89년에는 세계보건기구 친선대사로 임명해 주었다.
 또 84년에는 ‘미일재단’을 설립해 미국의 각종 단체에도 수많은 기부를 해 왔는데, 이 재단의 명예고문에는 포드·카터 전 대통령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밖에 미국 국제경제연구소에 40만달러, 카네기 평화재단에 20만달러를 제공했으면 84년에는 ‘대영재단’ ‘프랑스 사사카와 재단’ ‘일중 재단’ 등을 차례로 설립해 노벨 평화상 획득을 위한 자선사업을 꾸준히 펴왔다.

 그러나 ‘A급 전범’에서 ‘반공 투사’ ‘평화의 사자’로 이미지를 바꿔보겠다는 그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지금까지 외국으로부터 받은 주요한 상은 ‘유엔 평화상’과 ‘간디 세계평화상’. 바라고 바라던 노벨 평화상은 몇차례 도전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발로 끝났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사사카와에게 76년 9월 훈1등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게다가 박정권은 그를 청와대로 초청해 융숭히 대접했다. 그의 자서전 《인류는 모두가 형제》라는 책에는 이 때 박 대통령의 영애 박근혜씨와 40분간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 정권, 76년에 수교훈장까지 수여
 사사카와는 또 82년 원광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 생활을 할 때는 그의 아들이자 현 이사장인 사사카와 요헤이씨가 “백담사를 직접 찾아가 위로 친서를 전달했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파시스트’도 최근 들어 옛날의 위세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쩍 쇠잔해졌다. 94세의 고령에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 다툼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월간《문예춘추》의 보도에 따르면 사사카와는 오래 전부터 자기 혈육은 절대 선박진흥회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89년 5월 전임 이사장이 병환을 이유로 퇴직하자 돌연 셋째아들을 이사장으로 발탁했다. 이사장은 회장 다음가는 자리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선박진흥회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사사카와가 죽은 뒤에도 ‘사사카와 왕국’이 온존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사카와는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 덕택으로 30여 년간 외부 개입을 차단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다나카 전 총리와 고다마가 선박진흥회를 획득하기 위한 공작을 벌인 적이 있었다. 사사카와는 이 때 ‘록히드 사건의 정보를 미국에 제공해 이들의 개입을 배제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이 때문에 현 이사장 요헤이는 취임 직후부터 사사카와 왕국의 방어벽을 굳히기 위한 정치력을 기르는 데 주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요헤이 이사장은 갖은 의혹 사건을 일으켜 그것이 지금 내부고발 형태로 일본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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