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몸값’ 3백만원씩 받았다”
  • 부산.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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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情 ‘압송선’ 용금호 선원 최초 증언 / ‘김대중 납치 비밀과 진실’



 《시사저널》 취재진은 최근 73년 김대중씨를 납치해온 것으로 알려진 선박 용금호 선원의 소재를 추적해 그들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그들은 용금호가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이었으며, 용금호의 ‘화물’이 김대중씨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또 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뿐만 아니라 용금호 선원 2명도 납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거사가 끝난 뒤 용금호 선원들에게 거액이 건네졌다는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대중씨 납치 사건에 대해 관련자들이 직접 증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대중씨가 납치될 당시 일본 항구에 정박했던 한국 선박은 모두 70여 척이었다. 그 중에서 김대중씨를 한국으로 싣고온 혐의가 가장 짙은 선박이라고 일본 경시청이 지목한 것은 용금호였다. 용금호는 당시 한달 넘게 일본의 이 항구 저 항구에 머물다가 김대중씨가 납치된 다음날인 8월9일 아무런 화물도 싣지 않고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씨는 77년 미 하원 프레이저위원회 공청회에서 김대중씨를 한국으로 싣고 돌아온 배는 중앙정보부 공작선 ‘금룡호’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취재진이 처음 용금호에 대해 취재할 때만 해도 용금호가 분명히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지, 또 김대중씨를 납치해온 배인지 알 수 없었다.

 취재진은 교통부가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에 보내온 용금호 선원에 대한 신상자료를 토대로 추적에 들어갔다. 교통부가 보내온 자료에는 당시 용금호 선원 20명 중 7명의 명단과 주민등록번호, 주소가 기재돼 있었다. 교통부는 7명에 대한 자료만 보낸 데 대해 ‘나머지는 80년 1월 이후 배를 타지 않아 기록이 없다. 계속 추적해 다른 사람들의 소재도 파악하겠다’라고 밝혔다.

 교통부 자료에 나와 있는 7명은 모두 부산에 살고 있다. 자료에 주소가 나와 있기 때문에 취재진은 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교통부 자료에 나와 있는 주소는 모두 80년대 초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통부가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에 80년대 초반의 주소를 그대로 기재해 보낸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전국의 행정망이 전산화돼 있어 요즘은 주민등록번호만 입력하면 단박에 현주소를 알아낼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그러지 않았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취재진이 천신만고 끝에 처음 만난 사람은 ㅇ씨였다. 그러나 ㅇ씨는, 자기는 김대중씨 사건이 있은 직후 용금호에 탔기 때문에 아는 게 없다고 답변했다. ㅇ씨는 자기가 배를 탔을 때 용금호는 일본에 가지 못하고 강원도에서 명태와 무연탄을 실어 날랐다고 말했다. 기자가 실망하고 돌아서려는데 ㅇ씨는 “절대 책임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는 전제 아래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당시 부둣가에서 선원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얘기였다.

 “용금호는 선원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당신 선원들은 용금호가 중앙정보부에서 운영하는 배이기 때문에 그 배만 타면 떼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배에서 한 달만 일하면 몇년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실제로 세관에서는 그 배가 언제 출항하고 입항하는 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배에 타게 됐을 때 여러 사람이 부러워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진실은 크게 다르다”
 ㅇ씨는 용금호가 과연 중앙정보부 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외항 선박 중에서는 가장 큰 특권을 누렸다고 얘기했다. 그는 또 용금호 선장은 배를 움직이는 일만 맡았을 뿐 실권이 없었다며 당시 배에서 큰소리를 치던 몇몇 선원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들을 찾아가 보아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ㅇ씨가 얘기한 몇명의 용금호 ‘실세’ 가운데 교통부 자료에 인적 사항이 기록돼 있는 사람은 ㅈ씨밖에 없었다. 수소문해 보니 ㅈ씨는 ○○해운회사의 선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ㅈ씨는 취재진의 면담 요청을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20년이나 지난 옛일을 다시 들추어내고 싶지 않다. 검찰이나 국회에서 증인으로 부른다면, 글쎄…. 그래도 아마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알려진 사실과 진상은 상당히 다르다”라고 얘기했다. 기자는 그에게 차라도 한잔 하자고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ㅈ씨와의 접촉이 실패로 끝나자 취재진은 허탈감에 빠졌다. 교통부 자료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급 선원이기 때문에 진상에 대해 거의 모를 것이며, 조금 안다고 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재진은 계속해 나머지 사람들의 소재를 추적했다.

 조시환씨(65·부산 사하구 감천 1동)는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이었다. 그는 현재 맥도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경비 일을 하는데 뜻밖에도 취재진이 알고 싶어하던 사실을 거의 모두 얘기해 주었다.

 조씨는 “이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는가. 다시는 이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는 사실을 털어놓겠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취재진과 그가 인터뷰하는 자리에는 그의 부인과 아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도 “20년 만에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그의 얘기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용금호는 중앙정보부에서 운영하는 배였으며, 김대중씨를 납치해 한국으로 실어온 것도 바로 용금호라는 것이다.

 “용금호는 원래 미군 수송선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불하받아 공작선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배에 탄 선원들은 모두 지문을 찍고 그 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조씨는 당시 용금호가 여러가지 잡화를 실어나르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였다고 말했다. 그는 조리장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용금호가 일본에 가는 주목적은 기관원들을 실어나르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용금호에 탄 기관원과 선원이 밀수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는 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 본부가 개입돼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용금호가 일본에서 돌아오면 대개 검은 지프가 대기하고 있다가 물건을 실어갔다고 한다.

 조씨의 증언이 이어졌다. “20년 전 일이라 분명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용금호에는 중앙정보부 요원 두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선원 두사람이 하선했는데 나중에 하선한 선원 2명이 김대중씨를 보트에 싣고 배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그들 2명을 도쿄의 그랜드 팔라스 호텔에서 김대중씨를 납치할 때 현장에 있었을 겁니다.”

 김대중씨는 배 뒤편에 있는 창고에 사지를 결박당하고 눈이 가려진 채 감금돼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갇혀 있는 창고는 철저히 출입이 통제돼 하급 선원들은 드나들 수 없었지만 조씨는 식사를 가져다 주어야 했기 때문에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그때 김대중씨가 식사를 가져다 주어도 먹지 않아 미숫가루를 물에 풀어다 주었더니 몇 모금 넘기더라고 회고했다.

 조씨는 김대중씨가 얘기한 것처럼 선원들이 김대중씨를 자루에 넣고 추를 매달아 바다에 던지려고 했는지는 보지 않아 잘 모른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헬기가 나타났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거사가 끝난 뒤 선원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거액의 위로금을 주었다고 한다. 조씨는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부산에 입항한 뒤 정보부 담당자가 요정 같은 데서 위로연을 열어주었으며, 술자리가 파한 뒤 한사람당 30만원씩 준 것으로 기억한다”고 얘기했다. 용금호 선원들은 김대중씨 납치 사건이 있은 뒤 모두 외항선을 타지 못하게 됐다. 일본에서 용금호 선원 전원에 대해 수배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정보부 본부에서 2명이 파견돼 직접 선원들의 일자리를 주선해주고 보상비조로 한사람 앞에 3백만원씩 지급했다고 한다. 당신 3백만원은 집 한 채를 사고도 남을 만한 거액이었다.

 조씨는 보상비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추잡한 일이 벌어졌다고 얘기했다. 당시 윤씨라고만 알려진 정보부의 책임자가 어리숙해 보이는 선원들에게 가는 보상금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다. 조씨도 나중에야 용금호 동료 선원들에게 3백만원씩 건네졌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와 담판을 지은 끝에 겨우 2백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조씨는 윤이라는 기관원이 나중에 제주도에 땅을 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윤씨가 김대중씨 납치를 현장에서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해군 대령 출신 윤진원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미·일 사이에 ‘거래’ 가능성
 조씨의 증언으로 취재진의 궁금증은 대부분 풀렸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대중씨를 납치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들이 분명히 상부로부터 김대중씨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 계통의 최상부에는 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김대중씨 납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ㅇ·ㄱ씨 등 두 선원의 소재를 추적했다. 그러나 그들과는 끝내 만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행적이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지워져 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깊어질 뿐이었다. 부산항만청 해운국 선원계와 선박계에는 용금호와 거기에 탔던 선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참고로 사건 당시의 수사기록을 찾아보았다. 74년 8월14일자 서울지검의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기록 중 용금호와 관련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용의점이 농후한 용금호에 대해서는 그 항해 상황, 입항 절차, 선원 동향에 이르기까지 면밀하게 조사했지만 이렇다 할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에 앞선 73년 8월27일자 수사기록에는 용금호 선장과 1등 항해사 등 간부 선원이 모두 엉뚱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중앙정보부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여러 기관이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취재진이 취재를 마쳐갈 즈음 73년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가 민주당 진상조사위와의 접촉에서 “김씨를 태운 납치 선박의 살해 기도를 마지막 순간에 저지한 비행기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해상에 출현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증언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그레그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하고, 미국 정부의 훈령을 받아 실행 가담 요원 명단까지 청와대에 들고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얘기했더니 박대통령이 비행기 출동을 지시했다”하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박대통령이 직접 살해 혹은 납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83년 1월 미국에서 자신에 대한 납치 사건은 박대통령의 두번에 걸친 지시에 따라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시켜 저지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80년 봄 이후락씨가 김대중씨에게 동교동측과 가까운 국회의원을 통해 그같은 사실을 알려왔다는 것이다.
 이제 김대중씨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박대통령이 직접 납치 혹은 살해 지시를 내렸는가 하는 점과, 사건을 유야무야 덮어버리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가 하는 것으로 좁혀지게 됐다.

정부 나서면 진상 규명 문제 없어
 그동안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우리나라에서보다는 오히려 일본이나 미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납치의 진상을 알리는 주요한 증거와 증언 들은 주로 일본 언론을 통해 우리나라에 역소개됐다. 이제 우리 정부도 진상 규명에 적극 나서야 할 때가 됐다. 이번 용금호 선원 취재를 통해 《시사저널》취재진은 만약 정부가 진상을 규명할 의지만 있다면 이 사건의 전모는 하루아침에 드러날 수 있으라는 점을 확인했다. 이 사건 진상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만 해도 수십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의혹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제나 ‘배후에는 정보기관이 있다’는 뒷말이 따랐다. 용금호 선원들은 지난 독재정권 체제 아래에서 국가의 정보기관이 어떤 횡포를 저질러왔는가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증언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독재체제 유지에 봉사하면서 그 대가로 어떤 특혜를 누렸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김대중씨에 대한 살해 혹은 납치를 누가 지시했고, 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으로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어떤 형태를 보였는지도 철저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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