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전사 군인들이 먼저 발포했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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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당시 보안반장 증언 / “김오랑 소령은 상관 체포 막다 사살당해”



 그날 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는 특전사령부 건물은 유난히 고요했다. 2층 사령관 집무실에서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정병주 사령관의 고함만이 보이지 않는 긴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새벽3시께, 중무장한 군인 10여명이 사령관실로 통하는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왔다. 맨앞에 선 인솔자는 특전사 3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이들은 사령관실(비서실)로 밀려들어갔다. 그로부터 10여 분간 요란한 M16소총 소리가 사령부 건물은 뒤흔들었다. 일곱 시간 전인 12월12일 오후 6시30분께 한남동 정승화 총장공관에서 울린 총성이었다면, 이 시각 특전사령부에서 울린 총소리는 그 마지막을 고하는 것이었다.

 총성이 멈추자 특전사 소속 군인들은 왼쪽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강제로 끌어내 건물 옆에 미리 대기 시켜 둔 지프에 실었다. 잠시후 사령관실로부터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신 한구가 들것에 실려나왔다.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었다. 그는 12·12 주모 세력이 상관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는 것을 막으려다 사령관이 보는 앞에서 사살당한 것이다.

 12·12 쿠데타를 성공시킨 직후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날 밤 총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사망자는 3명으로, 김오랑 소령 외에 국방부를 지키다 쿠데타에 동원된 1공수여단 병력에게 사살당한 정선엽 병장과 합수부 헌병 박○○ 상병이다.

체포조 “먼저 쏘기에 반격했다”
 사망자 중 운명적으로 쿠데타 저지 편에 서야 했던 김소령 및 정병장의 죽음에 관해서는 5·6공화국을 통틀어 공식적인 언급이나 평가가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김오랑 소령의 경우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최후까지 병력 동원 노력에 분주했던 정병주 사령관을 몸으로 사수했다는 점 때문에 신군부 핵심들에게는 사후에도 ‘미운털’이 박혀온 터였다. 사살된 후 특전사 뒤 야산에서 서둘러 초라한 장례 절차를 밟았다가 김소령의 동기인 육사 25기생들의 강한 반발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80년 2월29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요즘 12·12 쿠데타는 총체적으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김대통령마저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12·12의 성격을 규정한 마당에 그날의 상황과 현장을 검증하는 일은 필수과제로 대두된다. 그 중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김오랑 소령이 사살된 현장이다.

 12·12가 쿠데타라고 결론이 모아지는 상황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곡된 내용이 사건 당사자들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주거나 살아남은 자들에게 변명의 구실을 준다면 이 또한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김오랑 소령 사살과 관련해 일반에게 알려진 내용이 바로 그런 사례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소령 사망 경위는,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사령관 체포조에게 김소령이 먼저 사격을 가해와 부득이 대응사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쿠데타를 총지휘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병력 동원 노력을 벌이고 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휘하 부대장들을 시켜 체포토록 명령했다. 정사령관은 특전사 3여단장 최세창 준장을, 장사령관은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을 시켜 체포케 한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명을 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13일 밤 12시5분쯤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해 정병주 사령관과 담판에 들어갔다. 정사령관은 병력 동원을 중지하라는 최여단장의 설득을 단호히 거부했다. 5분쯤 지나 사령관실을 나온 최여단장은 3여단 휘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을 불렀다. 이로써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15대대 소속 특전사 요원 10여명이 사령관 체포조로 편성됐다. 나영조·김홍렬 대위와 신현수 상사, 그밖에 하사관급 대원 5~6명이 차출됐다.

 이들 체포조는 사건이 끝난 후 지금까지 사령관실 문을 열려던 일행에게 김오랑 소령이 먼저 총을 발사해 하는 수 없이 응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령관 체포조를 진두지휘했던 박종규씨(예비역 소장, 지난 5월 12·12와 관련해 56사단장에서 예편)는 최근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병력을 이끌고 사령부로 갔더니 사령관실 문이 잠겨 있었다. 왜 그랬는지 순간적으로 사령관이 피신했구나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문고리를 돌리고 열쇠로 열려고 했다. 그 순간 안에서 총을 쏘았다. 내가 왼쪽 손목에 총상을 입었고 나영조·김홍렬 대위와 신현수 상사가 총에 맞았다. 그걸 본 부하들이 순간적으로 응사했다. 사령관실에 김오랑 소령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미처 부하들을 제어할 틈이 없었다.”

 당시 박종규 대대장을 따라 사령관을 체포하러 갔다가 턱에 총상을 입었던 신현수씨(42·주택은행 성남 상대원지점 경안출장소 근무)도 박종규씨와 같은 주장을 한다.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돌리고 걷어차는 순간 안에서 총격이 있었다. 총을 사용하라는 지시는 받은 적이 없다. 공수부대는 지시를 받고 총을 쏘는 그런 부대가 아니다. 공격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반격하도록 훈련받은 조직이다.”

“박종규 중령이 ‘갈겨’ 명령”
 체포 지시는 받았지만 먼저 총을 쏜 것이 아니며, 사령관실에서 총알이 날아오자 부하들이 반사적으로 총을 쏘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 유일한 현장 목격자가 나타나 가해자측의 이같은 주장에 상반되는 증언을 하고 나섰다. 《시사저널》 취재진을 만나 “13년 만에 당시 목격한 현장 상황을 털어놓는다”고 말한 그는 당시 특전사령관실 보안반장으로 있던 김충립씨(48·당시 소령)이다.

 “그날 밤 나는 보안사로부터 정병주 사령관의 병력 동원 상황을 점검해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고 사령관 비서실에 있었다. 특전사령관실은 복도에서 문을 열면 비서실이 있고, 그 안쪽에 사령관 집무실, 또 그 안쪽에 내실(사령관 침실)로 되어 있다. 비서실에는 보안사령관 전속부관인 장○○ 대위도 근무하고 있었으나 초저녁에 ‘상황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이미 피신해 버려 김소령과 나 둘만이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12일 밤 11시 반쯤 정사령관 지시로 사령부 내 위병소대에 무장출동 대기 지시가 내려졌다. 12시5분께 최세창 3여단장이 사령관을 만나러 왔다가 5분 뒤쯤 어두운 얼굴로 떠났다. 그순간 김오랑 소령이 자기 자리에서 38구경 권총을 꺼내 실탄 7발을 장전하였다. 내가 김소령에게 실탄을 왜 장전하느냐고 물으며 말리니까 ‘보안사 병력이 우리 사령관을 잡으러 온다’면서 나의 만류를 듣지 않았다. 12시15분쯤 복도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김소령은 사령관실로 들어가 달깍 소리를 내며 문을 잠궜다. 그리고 곧바로 M16소총으로 무장한 특전사 병력 10여 명이 군화 소리를 크게 내며 와락 비서실로 달려들었다. 박종규 중령은 비서실 구석에 서 있던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령관실 문고리를 돌렸다. 그는 문이 잠겨 있음을 확인하자 ‘갈겨’하고 명령했다. 순간 뒤에 선 부하가 문고리 주위에 대고 M16 연발사격을 가했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자 그 틈새로 김오랑 소령이 권총 한발을 발사했다.  그 총알은 비서실 문 밖 벽에 맞고 튕겼다. 총격전이 시작되자 나는 복도로 피했다. 김정룡 보안대장이 나를 보더니 피하라고 했다.”

 김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더니 말문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김오랑 소령이 권총에 총알을 장전할 때 적극 막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내본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총격전이 벌어지던 중 부하인 박기정 상사와 함께 사령부 건물 주차장 앞에 서 있는 20m 높이의 정원수 가지에 올라가 2층 사령관실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정병주 장군이 특전사 병사들에게 개 끌리듯 사지를 붙들린 채 끌려갔다”는 게 그의 목격담이다.

 사태가 끝나고 수습차 사령관실에 들른 그는 김오랑 소령이 내실 안쪽 문앞에서 사살됐음을 확인했다. 실탄 7발이 발사된 김소령의 권총과 두발이 발사된 정병주 사령관의 권총은 그가 회수했다. 확인 결과 김소령은 배·허벅지 등에 M16 탄환 여섯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날 밤 특전사 총격전 내막에 대한 김충립씨의 목격담은 12·12 쿠테타 당시 지휘관들의 도덕성,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명예 등과 관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씨는 국회에서 12·12 관련 국정조사가 진행되는 현재 그날 밤 상황에 대한 현장 검증에 참여할 뜻이 있다고 밝혔다.

 김오랑 소령의 사망으로부터 이어지는 불행의 파장은 오랫동안 지속 됐다. 김소령이 지키려고 했던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그날 밤 합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강제예편됐다. 그는 면전에서 죽어간 김소령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괴로움 속에 해마다 국립묘지를 찾아 부하의 묘소를 돌보았다. 그러던 정 전사령관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것은 지난 89년 3월이었다. (《시사저널》185호 참조). 현장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지켜본 정장군은 당시 12·12 진상 규명에 희망을 걸고 활발한 움직임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경찰의 ‘자살’ 처리를 놓고 의혹이 따랐었다.

 정병주 장군이 사망한 이듬해에는 고 김오랑 소령의 유일한 유족이던 백영옥씨가 역시 의문의 추락사를 했다. 백씨는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져 바로 실명했다. 남편의 죽음을 사흘 뒤에야 통보받은 백씨는 장교 관사를 한동한 비워주지 않고 끈질기게 진상을 알아보러 다녔다. 특히 남편을 쏜 병력의 지휘관이 박종규 중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백씨는 이웃에 사는 박중령 집을 찾아가 배신감을 토로하며 따지기도 했다고 한다. 육사 25기인 김오랑 소령은 23기인 박종규 중령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사건 바로 전날 밤에는 김소령 부부가 박중령 집을 찾아가 오래도록 어울린 일까지 있기 때문에 백씨의 충격은 걷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날 밤 현장목격자 김충립 보안반장도 큰 아쉬움을 표시한다.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오기 전에 박종규 중령 밑에서 부대대장을 지냈다. 박중령은 사령관을 체포하러 왔을 때 당연히 안에 있던 김소령에게 자기가 왔으니 쏘지 말고 말로 하자고 먼저 설득을 했어야 옳았다.”

 백영옥씨는 박종규 중령에게 한을 간직한 채 80년 5월 부산 친정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백씨는 부산에서 불교 자비원을 열어 소외된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상담하며 소일했다. 김소령과의 사이에 소생이 없어 두명의 불우 소녀를 수양딸로 삼아 데리고 살던 백씨는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여소야대 정국이 도래하자 남편의 명예 회복에 희망을 걸고 소송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92년 6월28일 밤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불교 자비원 5층 난간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사망한 것이다.

소송 걸고 ‘자살’한 미망인
 백씨의 수양딸 백수지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엄마에게는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현장의 난간 높이가 1m나 돼 장님인 엄마가 헛발을 디디기에는 너무 높았는데도 실족사로 처리됐다. 엄마가 자살하려면 그 전에 어렵던 시절에 자살했어야지 돌아가신 아빠의 억울한 희생을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을 때 자살한다는 건 믿을 수 없다.”

 백씨는 사망 전인 90년부터 장기욱 변호사(현 민주당 의원)를 통해 소송을 제기했다. 장변호사는 “90년 6월 나와 만나 박종규 최세창 전두환 노태우 허삼수 씨를 고소하기로 하고 국가를 상대로 10억에 상당하는 피해보상 요구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그 뒤 미망인은 모처에서 자꾸 위협을 한다며 소송을 포기하겠다고 해 결국 보류시켰었는데 의문사 소식이 들렸다”라고 밝혔다.

 결국 김오랑 소령이 지키려 했던 정병주 장군과 사건 진상 규명을 추진하던 김소령의 미망인 백영옥씨가 잇따라 변사체로 발견됨으로써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진 셈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당시의 목격자가 13년 만에 입을 연 사실은 진상 규명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김오랑 소령 주변을 둘러싼 불행한 사태들과는 달리 12·12 당시 김소령을 사살한 부대원들은 이후 신군부의 혜택을 입었음이 확인돼 대조를 이룬다. 사령관 체포조 10여명 중 교전 과정에서 박종규 중령이 왼쪽 손목에, 나형조·김홍렬 대위와 신현수 상사가 각각 손목·턱·옆구리에 부상을 입었다. 박중령은 이후 그리스에 무관으로 나갔다가 연대장·부사단장·국군사격지도단 단장을 거쳐 지난해 12월 소장으로 진급해 56사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12·12 쿠테타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지난 5월 김대통령은 그를 강제 예편시켰다. 나영조 대위는 옆구리 총상을 입은 후 전역해 신군부의 지원으로 영동고속도로상의 한 휴게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한 하사관은 사건후 김포공항 매점권을 얻어 운영중이라고 한다.

 그날 사령관 체포에 동원된 부대원들 중 위관급 이하 행동대원들은 ‘12·12동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우의를 다지고 있다고 한다.

 12·12에 대한 재조명이 본격화한 요즘 군 내에서는 김오랑 소령의 ‘군인 정신’을 기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극상이 난무하던 당시 상황에서 김소령이 목숨을 바쳐 사령관을 지키려 했던 정신이야말로 국군이 걸어가야 할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고 김소령과 육사 동기인 한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12년간 김오랑 소령의 행위를 ‘무모한 짓’으로 넘기려는 분위기가 군 일부에 자리잡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12·12를 주도한 수뇌부도 군인 입장에서 되돌아본다면 김소령 같은 부하를 두는 게 소원이었을 것이다. 문민 정부는 김소령의 억울한 희생을 공식적으로 명예회복시키고 나아가 그의 참된 군인 정신을 군인의 귀감으로 가르쳐야 한다.”
丁喜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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