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은 왜 ‘FTA 올인’ 택했나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6.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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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정’ 포기 목표 정하고 ‘급발진’

 
한미 FTA가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라는 반대파의 공격에 대해 정부 관계자들은 “ 2~3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왔다”라고 반박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발표된 미국측 자료를 보면 한국이 2004년 초 미국에 먼저 한·미 FTA를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제안 시점이 2년 전이라는 것과 그때부터 준비가 철저히 이루어졌다는 점을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미 FTA는 미국이 시큰둥하는 바람에 1년 가까이 표류했다. 그 때문인지 그 즈음 노대통령의 동북아 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된 청와대 동북아시대위원회나, 관련 보고서를 생산하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등에서 한미 FTA는 핵심 의제가 아니었다.

2005년 8월까지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일한 한 인사는 “나는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까지 한·미 FTA가 핵심 아젠다가 아니었다는 정태인 전 비서관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정부측이 한·미 FTA 홍보를 위해 인용하고 있는 각종 보고서를 제공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한 관계자 역시 “한·미 FTA에 들어가니 제대로 된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올 1월에 받았다”라고 말했다. 

미국통이자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문정인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의 얘기는 더 구체적이다. “미국은 당초 스크린 쿼터제와 한·미 BIT(양자 투자 협정)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한국과 무슨 FTA냐며 관심 없어 했다. 그러다 2005년 6월 이른바 4대 과제를 한국이 해결한다면 FTA를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 왔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서 한미 FTA가 본격화했다”라고 말했다. 4대 선결 과제란 스크린 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금수조치 해제, 의약품과 자동차에 대한 무역장벽 제거로, 이 문제는 2005년 10월부터 올 1월까지 신속하게 풀렸다. 각 부처가 그동안 높이 쌓아올렸던 방어벽이 불과 3개월 만에 뚫렸으니,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장벽이 제거된 것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노대통령은 직접 한·미 FTA 홍보대사 구실까지 도맡고 나섰다. 각종 회의나 행사에 참석해 한·미 FTA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3월23일 인터넷 언론과의 대화에서는 영화배우 이준기씨를 상대로 스크린 쿼터를 축소해도 되는 이유를 역설했다.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타게 된 데는 이처럼 노대통령의 ‘결심’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해 6월 이후 노대통령이 한·미 FTA ‘확신범’이 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즈음 노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호된 역풍에 직면했다.  당시 노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갈등과 대립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의사 결정 구조나 정치적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라면서 그 예로 노사문제, 국민연금, 조세개혁, 교육 및 의료개방 등을 들었다. 당사자들의 이해 관계가 팽팽하게 대립되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던 이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면 정치적·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연정론은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로부터도 반발을 샀고, 노대통령은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며 3개월 만인 9월20일 논의 중단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채 안 된 10월2일 노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 한 권을 소개했다. “이 책을 읽고 우리 나라의 미래 생존 전략과 관련해 영감을 얻었다”라는 극찬을 곁들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열강의 각축전을 역사적으로 분석해, 앞으로 한국이 어떤 생존 전략을 써야 할지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반발 기류 거세지자 ‘적극 대응’ 지시

“한국은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비슷해지는 2020~2030년경에 통일을 이루고 아시아의 스위스, 동북아의 균형자로 거듭난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이 단독으로 동북아의 세력 균형자가 되기 힘들다. 따라서 그 때까지는 최대 패권국인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해 신뢰를 쌓고 실력을 기르는 일이 급선무다.”

대선 후보 시절 노대통령의 정책팀장을 맡았고, 청와대 국정과제팀장을 거쳐 국회의장 정책비서관을 지낸 배기찬씨가 쓴 이 책을 노대통령은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공식 석상에서 언급했다. 지난해 11월11일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출입기자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돌리며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 책이 대통령의 정국 구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배씨는 올 2월 동북아시대위원회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10월 이후 노대통령의 정책 방향은 급격하게 ‘친미’ 쪽으로 선회했다. 2005년 11월17일 노무현-부시 두 정상의 ‘경주 공동선언’이 상징적이다. 경주 공동선언은 △한·미 동맹 강화 △9·19 북핵 공동성명 이행 합의 추진 △한·미 경제협력 강화라는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이는 2006년 1월 반기문-라이스 간 주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2월 김현종-로브 포트먼 대표 간 한미 FTA 개시 선언으로 이어졌다.

외교·안보에 이어 경제 동맹을 선언한 한·미 FTA에 대해 노대통령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미국 시스템과 경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미꾸라지 통에 메기를 집어넣으면 미꾸라지가 안 잡아먹히려고 열심히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튼튼해진다”는 이른바 ‘메기론’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취임 초만 해도 ‘자주성’ ‘독자성’ ‘주도성’ 등을 강조하며 한국의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적극 설파하던 노대통령이 불과 몇 년 사이에 1백80도 돌변하자 기존 지지층에서부터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라는 호된 충격을 경험한 중산층과 서민 사이에서는 또 한번 준비되지 않은 외부 충격이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지 않을까 잔뜩 걱정하는 분위기다.

국회 논쟁도 서서히 가열되고 있다. 논쟁을 촉발한 정태인 전 비서관은 정치권의 각종 모임에 강사로 불려다니느라 바쁘고, 지난 주 내내 대정부 질문 답변자로 나선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여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의원들의 ‘졸속’ 추궁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여권 내 차기 주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자칫 재집권 기반마저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런 반발 기류에 대해 노대통령은 적극적인 대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참모는 “대통령은 당장의 유·불리보다 나라의 미래를 더 걱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판단을 믿어 달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비관적이다. 벌써 김옥균이니 홍재학이니, 개화파니 위정척사파니 하며 한·미 FTA를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다. 대연정만큼이나 거칠게 튀어나온 한·미 FTA가 또다시 국론 분열의 불씨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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