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시위…폭력진압…예고된 참사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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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慶大군,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평화시위 정착, 백골단 해체 여론 높아

 대형사고가 일어난 뒤에 흔히 따르는 말이 있다. ‘예고된 참사’.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며 따라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전경사복체포조 5명이 시위진압 과정에서 백주에 대학생 한명을 쇠파이프 등으로 두들겨 패 치료도 받기 전에 숨지게 한 충격적인 사건도 ‘예고된 참사’로 해석되고 있다.

 길가는 시민이 요즘 대학생들의 시위모습을 한번이라도 지켜볼 기회가 있다면 그것이 ‘전쟁’이지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알리기 위한 ‘시위’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이 시민이 우연히 백골단, 즉 사복체포조의 ‘임전무퇴’ ‘초전박살’하는 진압을 보게 된다면 이들의 ‘한놈 죽이고 말겠다’는 듯한 기세에 잠시 호흡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준 전쟁터에 나간 戰士 명지대생 姜慶大(20·경제1)군은, 그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이른바 미필적 고의 수준을 넘어 거의 ‘살인정신’으로 무장한 적군에 의해 戰死한 것이라고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다.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부른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입생인 강군이 어떻게 과격시위에 참가하게 됐고, 그가 숨진 이날의 시위와 진압 과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되돌아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명지대생 1백50여명은 4월26일 오후 3시부터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교문 앞에서 ‘명지대 학원자주화 완전승리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서부서 진격투쟁’을 개시했다. 오후 5시경까지 최루탄 화염병 돌 등이 난무하는 예의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수건을 얼굴에 두른채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등으로 무장한 ‘전투조(화염병 투척조)10여명이 앞에서 싸우고, 노래와 구호로 이들을 응원하는 ’시위본대‘ 1백여명이 뒤에 서 있었다. 위급한 사태의 발생 등을 알리는 ’연락조‘에 속한 강군은 본대와 전투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강경대군은 89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재수끝에 올해 입학하여 시위에는 처음 참가한 ‘신병’이었다. 중장비 대여업(국일건설)을 하는 아버지 강민조씨(49·서울 성동구 중곡2동)와 어머니 이덕순(40)씨는 여느 부모가 그렇듯이 아들에게 늘 ‘데모하면 죽는다’고 일렀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강군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과 갈등이 너무 많았다.

 그는 그 같은 고민을 같은 학교 중문과 3학년인 누나 선미양(22)에게 털어놓았다. 누나는 ‘따람’(땅의 사람들)이란 노래운동서클을 소개해주었다. 학생운동에 막 발을 들여놓은 강군은 이날 긴장된 마음으로 첫 ‘전투’에 나선 것이다. 한달 전 교내시위를 구경하다 다연발최루탄 파편에 맞아 얼굴을 11바늘이나 꿰매는 수술을 받은 것이 어떤'투지‘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비하던 5시10분쯤, 사복체포조 한명의 몸에 불이 붙었다.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그의 뒷머리에 맞은 것이다. 격분한 경찰은 최루탄과 다연발최루탄(지랄탄)을 무차별 발사하고 지휘관은 진격 명령을 내렸다. “다 죽여버려. 끝까지 따라붙어 박살내”하는 소리와 함께 인근 골목에 숨어있던 사복조 2개 소대가 쇠파이프 등을 들고 시위대의 본대와 전투조 사이로 거의 동시에 돌진했다. 이들은 전날 밤 6시간동안, ‘범죄와의 전쟁’으로 일이 하나 더 생긴 주택가 방범활동을 벌인 몸이어서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학생들이 혼비백산해 교문 안으로 들어갈 때 교문 옆 무너진 담장을 ‘퇴로’로 고른 시위 초보자 강군은 사복조 한명에게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먹이’를 보고 순식간에 달려든 5명의 ‘靑 재규어(푸른 윗도리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복조의 차림새와 날쌘 동작을 표범에 빗댄말)들은 강군을 에워싼 채 2~3분 동안 쇠파이프와 대걸레자루, 구둣발 등으로 무참히 때리고 짓밟았다.

 피범벅이 된 강군은 이때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다. 즉석에서 분풀이를 한 뒤 연행하는 것이 사복조들의 다음 순서이다. 주동자급을 잡아들이면 포상휴가나 외출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연행을 포기하고 강군을 버려두고 달아났다.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실신한 상태여서 나중에 골치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사고를 치고’돌아온 사복조들에게 “머리는 때리지 말라고 했잖아. 이 ××들아”라고 힐난하는 소리를 한 목격자가 들었다. 사복조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평소 “깨진 수박은 받지않는다”고 말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생들은 이를 “말썽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패서 온전한 상태로 잡아오라”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학생들은 강군을 급히 학교보건소로 옮겼다. 이미 머리에서는 피가 멈췄고 간호사의 손에 맥박이 잡히지 않았다. 학교직원의 차에 강군을 싣고 인근 성가병원으로 달렸다. 의사는 그 자리에서 “둔탁한 물체의 타격에 의한 뇌출혈, 이마뼈 함몰로 사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이 때가 5시35분경. 두들겨 맞은 지 불과 20여 분만에 절명한 것이다. 학생들은 강군의 주검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옮기고 경찰의 ‘시신탈취 기도’를 막기 위해 규찰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했다.

 강군의 사망을 ‘일부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불상사’로 여기는 듯한 당국은 사건은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사건직후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곧바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고 시위진압을 지휘한 서부경찰서장, 해당 사복조 중대장과 소대장을 직위해제했다. 검찰은 이날 진압에 참가한 서울시경 제4기동대94중대3소대 가운데 이형용 일경(22)둥 사복체포조 전경 5명이 쇠파이프 구둣발 등으로 강군을 집단구타한 사실을 밝혀내고 이들은 모두 상해치사 혐의로 4월28일 구속했다.

 수사가 진행중이던 27일 저녁, 청남대에 머물고 있던 盧泰愚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무개 내무부 장관을 경질하고 李相淵(55)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새 장관으로 임명했다. 신임 이상연 장관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 미국 특수전학교를 마쳤고 보안부대장·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장·서울시 부시장·대구시장·안기부 1차장·국가보훈처장을 차례로 지냈다.

 그러나 李鍾國 치안본부장과 金元모 서울시경국장은 이번 문책인사에서 일단 빠졌다. 내무치안 행정의 최고 책임자와 일선 지휘관만 자르고 가운데 토막은 남겨두는, 다소 기형적은 문책인사였다. 신민당을 비롯한 야권은 이번 사건을 “노재봉 내각 출범이후 계속된 일련의 공안통치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하며 노재봉 내각의 총사퇴와 대통령의 사과를 촉고하고 나섰다.

 마침 임시국회 개회중에 사건이 터져 야당이 이를 ‘제2의 이한열군 사건’으로 규정하고 파상적인 공세를 펼침에 따라 정국은 급속히 긴장국면으로 들어서게 됐다. 재야는 국민연합 등 44개 단체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를 결성, ‘국민애도기간’인 5월4일까지 전국적으로 집회·시위를 벌여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세’의 만회를 꾀하고 있다.

 공안통치, 바꿔 말해 힘의 논리에 의한 통치가 강군 사건을 불렀다는 야권의 시각이나 예고된 참사였다는 일반의 지적은, ‘범죄와의 전쟁’ 이후 정부당국이 보인 초강경 일변도의 시위 대응 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89년5월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제정되는 등 시위에 대한 대응이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바뀌었으나 과격시위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자 지난해 10월 대 범죄전쟁 선포에 맞춰 시위학생들은 조직폭력배와 동렬에 놓고 강력히 응징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시경이 당시 일선 경찰서에 지시한 ‘실천계획’은 종래의 공격형(방어형은 오래 전에 없어졌다) 시위진압에서 체포형으로 전환하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국가 주요 시설과 경찰관서 기습은 과감한 무기사용으로 완전히 제압하며 △가두시위는 기존의 공격형 진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검거 위주의 포의작전을 펼치며 △화염병을 투척한 자는 학교내까지 들어가 최대한 검거하라.

 물론 여기에 “쇠파이프로 때려서라도 학생들을 제압해라”는 지시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성부의 강경방침은 밑으로 전달될 때 무력사용의 가급적 억제 쪽이 아닌 확대사용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될 가능성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그 결과 시위현장에서 줍거나 학생들로부터 ‘노획’한 쇠파이프 각목 등 비정규적인 위험한 장비를 사복체포조들이 가지고 다녀도 지휘관들이 묵인·방조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돌맹이를 주머니 안에 갖고 다니면 학생들에게 선제공격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7쪽 표1참조).

 시위를 전투로 인식하는 것은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더 먼저라고 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더 큰 폭력에 맞서는 최소한의 방어수단”이라고 학생들은 주장하지만 이들이 던지고 휘두르는 화염병과 쇠파이프는 엄연히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살인적인 무기라는 사실은 이번 사건과 그동안의 사망·중상 사례가 입증하고 있다(7쪽 표2참조). 검찰수사 결과 강군의 목숨을 앗은 쇠파이프는 사복조가 다른 학교 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 주운 것이었다.

 학생들의 과격시위와 경찰의 과잉진압이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는 지난 4·19 31주기 시위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일 경남대생 정진태군과 원광대생 유철근군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뇌수술을 받는 중상을 입었다. 다음 날에는 전남대생 최강일군이 KP최루탄에 맞아 왼쪽 눈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서로간의 폭력대결이 언제까지 계속되고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앞으로 더 나와야 되는 것인가. 말없는 다수 학생과 국민이 보기에는 시위학생들의 명분이 옳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국민의 정서와 욕구에 걸맞는 운동이 되지 않는 한, 특히 폭력적 시위방식을 평화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학생들은 공권력의 크고 작은 폭력사용은 물론 이번과 같은 ‘백주의 테러행위’조차 자신 있게 규탄할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평화적 시위를 당부하는 한편으로 이번 기회에 백골단을 해체하라는 여론이 높다. 복장부터 혐오감을 주고, 자제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진압전경은 벌써 사라졌어야 했을 구시대 억압정권의 유산이다. 이들이 거리에 진을 치고 서서 오가는 시민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어둡고 답답한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 한 ‘민주화’는 아직 멀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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