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노후 맞으려면
  • 여운연 차장 ()
  • 승인 199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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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남성 ‘상실·빈곤감’에 고통··· ‘역할전환’으로 적응해야

 11년간 영국 총리로 재임하다 작년말 명예롭게 물러난 마거릿 대처는 퇴임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후회는 전혀 없으며 나는 결코 후회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3개월쯤 지나 미국의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는 공직을 사퇴한 뒤의 충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지금도 차를 타고 의사당이나 집을 향해 가려고 화이트홀(런던의 중앙관청가)을 지날 때면 불현듯 ‘이제 다우닝가로 돌겠군’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곧 거기가 목적지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든 어느 시기에 도달하면 사회적 활동에서 물러나게 마련이다. 은퇴란 인생의 후반부에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정이지만 사람들은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이다 보니 때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정년 이전에 퇴직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정된 정년퇴직이라 할지라도 통상 55~60세에 은퇴를 하고 나면 그 이후의 ‘삶’이 상당히 길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크나큰 부담이 된다.

부인과 미묘한 대립적 갈등에 빠지기도
 일자리에서 물러난 뒤의 역할상실로 인한 현상으로 김애순씨(서울신학대 강사·심리학)는 경제적 문제와 자존심의 손상을 들고 있다.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많은 남성에게 퇴직은 최초로 역할이 변화하는 시기로, 사회적 소외감 등으로 인해 심한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퇴직 후 누구나 다 힘든 것은 아니며 개인의 성격에 따라 이를 수용하는 태도도 달라진다고 한다. 김씨는 성격 유형을 5가지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즉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에 만족하는 성숙형, 일생 동안 지녔던 무거운 책임에서 해방된 시기로 받아들이는 은둔형, 계속 사회활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무장형, 지나치게 비통해하는 분노형, 자신의 무능으로 이렇게 됐다고 후회하는 자학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퇴직 후 심리적 적응문제에 대해 김태현(성신여대·가족학) 교수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물러난 것인지, 좋은 건강상태였는지, 속해있는 조직체 규정에 의해 강압적으로 물러난 것인지. 퇴직 후 사회적 참여의 기회가 제공되는지 들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역할면에서 “사회와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며 생활해온 남성들이 그동안 가정생활에 깊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가 퇴직 후 집안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부인과 미묘한 대립적 갈등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노년기에 청소년·장년기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중요한 시기이다. 15~20년의 결코 짧지 않은 이 기간은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외국의 경우 사회보장제도가 뒷받침해주고 있으나 우리는 경제적으로 가족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형편이라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퇴직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달라지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금년 8월 정년퇴직하는 ㅅ대 이모교수(65)는 10요년 전부터 ‘노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왔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이미 서해안 연안의 조그만 섬에 부인과 함께 지낼 터전을 마련해놓았다. 몇 달 후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 시골로 내려가 태양열 연구도 하고 농사도 짓고, 가능하다면 현지 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퇴직에 대해 거의 강박관념을 갖다시피하면서 철저하게 준비해온 그는 “요즘 와서 생각하니 그동안 바친 정신적 투자로 오히려 지난 10년간의 생활이 비생산적이었다는 후회가 든다”고 말한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단 둘이 강원도 횡성군 깊은 산골로 들어가 자리잡고 사는 조영용(69)씨는 요즘도 하루종일 전력을 다해 일손을 놓지 않음으로써 잡념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한다. 조씨는 해군 장교로 18년, 선장생활 15년만에 가족과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것 같아 60세가 되던 해 스스로 퇴직을 결정했다. 그런데도 처음엔 무척 방황했다고 한다. 8년 전 생각끝에 부인을 설득해 1천만원 정도 들여 땅을 마련, 그곳에 들어가 집도 짓고 생전 해보지 못한 밭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원에서 노후를 보내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선망의 눈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 생활에 왜 고민이 없겠느냐”고 반문한다. 그저 내 힘 갖고 일 하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씨의 경우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비교적 빨리 자신의 역할을 전환해 새 환경에 적응한 예다.

‘퇴직 증후군’ 환자 많아
 그러나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동철씨에 따르면 우울증·근심·불안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신체적 기능장애까지 나타나는 퇴직 후 증후군 환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던 일에서 손을 놓게 돼 생긴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는 개인의 특성에 달려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온 운동이나 취미생활로 메울 수는 없을 터이고 나름대로 생산적인 일을 찾아야 하는데 주변여건이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정씨는 반드시 ‘돈되는’ 일이 아니라도 지금까지 가족에게 해주지 못한 일을 찾아 도와주는 것도 생산적이며 만족감을 증진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권한다. “구하면 길이 있다”는 말처럼 본인이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가족의 태도에 따라 가장의 심리적 상실감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퇴직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가족에게 위기감을 주는 것이지만 평생 동안 가족을 위해 일하다 그만둔 가장을 이해하려는 진실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씨는 “배가 출항할 때는 요란한 환영을 받지만 귀항할 때는 외롭게 돌아온다”면서 “따지고 보면 출항보다는 귀항이 더 중요한 게 하느겠느냐”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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