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友萬里' 21년
  • 안병찬 편집국장 ()
  • 승인 199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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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로 간 어느 간호원이 자전적인 수필집에서 향수에 관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은 향수를 거부하고 고국에 대해 싸늘한 태도를 보였는데, 독일인 남편이 이를 늘 민망하게 여기고 안타까워하더라는 것이다. 어느날 새 차를 사서 남편과 함께 교외주행을 하려고 자동차문을 열던 그는 멈칫하였다. 손바닥만한 태극기가 있었다. 남편이 어찌어찌 그것을 구해  자동차운전대 옆에 붙여놓은 것이었다. 그는 그 국기로부터 받은 감동으로 순간 힘을 느껴 고향의 푸르른 하늘을 그렸다고 쓰고 있다. 이 파독 간호원의 애잔한 향수에 비해 그 증세가 훨씬 심한 급성 망향병에 걸린 채 반생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50대의 梁浚容씨. 권력정치 바람에 휩쓸려 해외 귀양살이를 강요당했던 신문기자. 그는 일본과 미국을 전전하면서 21년 세월을 "항상 비행장 주변에서 살았다"고 단언한다.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이·착륙하는 대한항송 여객기의 푸른 날개라도 바라보려고 호놀룰루에 살 때는 솔트 레이크에, 로스앤젤레스에 살 때는 엘 세군도에 집을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양준용씨가 거쳐온 지난 21년은 다름아니 '3김시대'의 행로와 교차한 기간이었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양씨는 3선개헌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려한 박정희의 희생자였으나 3김은 박정희에 대응하여 3김시대의 서막을 올린 셈이었다. 그 이후 3김은 정치적 생명력을 끈질기게 유지해 오늘에는 절정기에 다다랐다고 봐도 좋을 터이다.

박정희의 3선개헌으로 결정된 운명
 1969년은 경술년. 양준용씨는 <경향신문> 정치부 국회반장이었다. 3선개헌 파동이 일어나던 그해 이른바 'JP계열'이 국회에서 반대하면 개헌안은 3분의 2 득표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1인집권 영구화의 전주곡인 3선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획책하고 있었다. 국민투표는 매우 편리한 대통령 중심제의 장식품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남용하여 그 위광을 과시함으로써 악명을 떨친 것이 국민투표였다.

 3선개헌 파동 전야에 양준용 기자는 집권세력이 획책하고 있는 국민투표 계획을 폭로하는 정치기사 한편을 썼다. 물론 그 기사는 <경향신문> 지면에 나가지 못했고 미행을 당하던 양기자는 기관원들로부터 3자택일을 강요를 받는다. "3선개헌을 찬성하여 정권쪽에 붙을텐가, 외국으로 귀양갈텐가, 아니면 서대문으로 직행할텐가."

 양기자가 일본을 향해 떠나던 날 'JP'는 보좌관을 시켜 김포공항에서 휘호 한편을 전한다. "              에게    '.

 타의에 따라 도쿄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던 양준용은 72년 3월23일 일본에 피신한 'DJ'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가던 택시 안에서 서울의 국회해산·유신 선포의 뉴스를 들었다. 같은날 도쿄 데이고쿠 호텔에서 'YS'를 만난 DJ가 공동투쟁을 제의 하지만 YS는 귀국해버리고, 이 장면을 지켜본 양준용은 정치권력을 향해 이미 팽팽한 경쟁관계에 있는 '양김의 숙명'을 느꼈다.

 양준용씨는 '반한인사·반한언론인'의 모자를 쓴 채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망명 허가가 난 것은 85년. 영주권이 나온 것은 89년 11월12일, 로스앤젤레스 한국총영사관에서 여권을 교부받은 다음날인 11월16일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기가 막혔다. 발이 땅에 닿은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남산에 제1터널 하나 있을 때, 강남의 제일 끝이 동작동 국립묘지일 때 쫓겨나지 않았나…."

이젠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 3김
 그해 말 양준용씨 부부는 동교동에 초청되어 DJ부부와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DJ는 "왜 통 연락도 소식도 없었나" 하고 물었다. 경술년 4월에 '모모모모'를 써준 JP는 90년 11월 민자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JP는 "반갑구먼, 전혀 안 늙었어"라고 했다. YS는 금년 3월 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경남고등학교 선배이기도한 YS는 "이 사람 미국서 사업하는 줄 알았더니 골프만 치나" 하며 반가워했다.

 양준용씨가 다시 돌아와 만난 3김은 한국정치의 오늘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들이다. 3김은 어느 정도의 다원화와 정치발전은 있으나 아직도 동질성과 화홥의 윤활유가 결여된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해 이제는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 집권세력과 제1야당의 대표들이 되었다. 요즘 집권당 대통령의 입에서 '3김 역할론'이 나오고, 민주당 총재는 '조건부 대권도전론'으로 양김의 대권행보 20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군 치사사건'의 처리를 두고도 3김은 여야에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인다.

 그렇지만 3김구조의 평가는 역사의 몫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권력경쟁·권력투쟁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영국 역사학자 토인비는 모든 생물은 자기중심적인데, 자기중심이란 곧 살고 있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며 권력은 자기중심의 한 결과일 뿐이라고 했다. 만일 모든 인간이 자기중심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권력은 소멸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3김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한국의 정치권력은 소멸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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