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지 실종이 원인”
  • 정리.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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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영 · 한상진 교수 시국대담/“분신 이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상진 : 노태우 정권의 임기가 이미 3분의 2 이상 지난 상태에서, 에기치 못했던 심각한 현상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접하면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인식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느낍니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많이 좋아지고 있다’ ‘민주화가 정착되고 있다’는 식으로 현상황을 다소 안이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개선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이에 인식의 차이, 더 나아가서 정서의 차이, 행도의 차이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병영 : 어떤 의미에서는 노정권이 이런 위기를 자초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권 후기로 접어들면서 민중세력이 약화되고 정권에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면서 민주화 의지의 퇴색과 공권력의 과잉 투입이 정권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지요. 89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공안정치라는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정권이 필요 이상으로 힘을 축적하는 양상이 두드러졌습니다. 학생운동이나 재야 · 노조 등에의 공권력 과잉투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최근의 수서 · 페놀 · 원진레이온 사건은 정책실패와 도덕성 상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불만이 축적되었다가 강군 폭행치사사건을 계기로 어떤 돌출구를 찾은 것이라고 봅니다.

 한 : 저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세가지로 봅니다. 첫째 노정권의 계급적 성격이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본래 노정권은 구체제의 승계세력을 대표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진단을 내립니다. 민선정부이고 구체제의 모순, 예를 들면 권위주의 청산을 표방했지만 이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3당합당 이후에 원내 다수의석을 인위적으로 확보하면서 모든 개혁의지가 사실상 실종되었습니다. 그 결과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주택정책에서 문제가 발생, 서민에게 엄청난 상대적 박탈감만을 안겨준 것입니다. 둘째로 인권문제를 거론하고 싶습니다. 국가보안법 안기부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누누이 강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3당합당 이후 구시대의 악법을 개폐하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고 학생이나 노동자의 인권침해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결국 노태우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인권보장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개혁을 요구하는 집단에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억압적 수단을 계속 써왔습니다. 셋째로 정부가 현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수사적인 언어에 매달리거나 시간만 지나면 해결된다는 시각이 현정권에 팽배해 있는 것 같습니다.

 안 : 사실 노정권의 속성상 민주화를 기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화가 되려면 힘있는 야당, 미중세력의 견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요인이 약화되면 정권의 본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재야의 제도권 흡수로 민중운동 학생운동이 퇴조했고 북한도 그리 위협적 존재가 못되는 상황입니다. 자기쇄신을 위한 외압에 시달리지 않으니까 본래의 정권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쇄신과 비판세력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하겠습니다.

 한 : 저도 중산층이안이한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분신을 자제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는 하지만 과연 이것이 학생들의 정서에 호소력을 가질까 의문이 듭니다. 앞으로 5월은 위험한 상황이 될 것이고 노태우 정부의 향방에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하리라는 관측고 가능하다고 봅니다.

 안 : 저도 분신이 격정에 휘말려서 순간적으로 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입니다. 분신은 일종의 자기모순일 수도 있는데 민중주의적 열망을 가지면서도 민중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끈질긴 삶을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겁니다.
 한 : 저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급증하는 괴리가 정말 심까하다는 것을 하굑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절감합니다. 젊은 세대의 잘못을 기성세대가 나무라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되겠지만 젊은 세대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고, 또 그들의 적극적인 기상을 키워주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들이 왜 분신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것을 겸허하고 자기반성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분신한 학생이 폐쇄적인 이념으로 무장된 학생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폭력의 사용은 단연코 거부해야 하지만 분신을 폭력과 같은 범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안 :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이고 또 책임감을 느낍니다. 개념적으로 분신을 부정하는 결의에 찬 얘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마 분신에는 적극적 낭만주의와 이상을 향한 근원적 열망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내가 살아서 성취해야 할 가치를 스스로 찾도록 도와줘야지 분시의 불가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안됩니다.

 한 : 이제 무엇이 필요하냐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차제에 기본인권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학문 · 사상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국가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인권을 쉽게 침해하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에 대한 기본인권의 유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정부 사회집단 언론이 모두 합심해서 전경구조 개선, 백골단 해체, 폭력적 시위 자제 등 평화적인 시위문화를 적극적으로 건설해나가야 합니다.

 안 :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로 가는 과도리라고 보는데 이미 민주화가 얼추 끝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정부에 있다고 봅니다. 뭐 대충 이 정도면 민주화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은 국민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1~2년 전에 집시법과 경찰개혁이 논의될 때 잘 해결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실천의지라고 보는데 정부가 궁지에 몰려서 하루아침에 만들어낸 몇가지 방안으로 국민의 바람을 풀어주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 정치력의 발휘가 중요합니다. 정치력이라는 것은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지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급진적 민중문호가 시민운동으로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급진에서 조금 벗어나서 모든 국민이 원하는 정서를 함께 읽고 전략도 융통성있게 조정 관리하는 능력도 키워야 합니다.

 한 : 위기적 국면이 도래하고 있다고 볼 때 궁극적인 결과가 노태우 정부의 토진으로 나타나리라고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ㄴ디ㅏ.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3당합당 이후 공안 정치가 계속되었고 그런 상태로 집권후반기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회의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일 정부가 공안통치의 기본틀을 견지하는 선에서 문제를 받아들인다면 어려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 국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 통제를 받지 않는 초법적 존재가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개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고 한다면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을 본격적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정권의 경제정책이 기득권계층의 이해관계에 매어 있다는 인상이 대단히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경제개혁이 철회되는 것을 우리가 목격했습니다.

 안 : 정치에 대해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졌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결국 우리 사회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이 체제에 기대할게 뭐가 있느냐 하는 좌절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전정한 해결을 위해 큰 결단을 해야 합니다. 누리는 자는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중산층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버릴 것이 많다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 이번 경험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 시대를 보는 감수성을 좀더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소망을 피력하고 싶습니다. 학생 노동자 지식인은 연속되는 권위주의 통제에 상당히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갈수록 많은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열려진 감수성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제도권 정당들도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시민들의 관심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필요합니다. 평화적 방법으로 시민의 관심을 모아내야 한다고 봅니다.

 안 : 문제를 나의 이해관계에서비추어보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집권세력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데 분명히 타집단에 대한 이해가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 : 이번 사태로 제도언론과 학생간의 사각차가 얼마나 큰지 잘 드러났다고 봅니다. 언론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에 지나치게 탐닉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어려운 위치에서 고통받고 있는 집단들의 실제적인 상황과 그들의 요구에 대해 좀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언론이 상황을 보는 눈이 좀 안이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수차의 위기를 발전적으로 슬기롭게 극복해온 역량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일도 지엽적인 수준이 아니고 좀더 근본적으로 발전된 미래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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