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 사람’ 만드는 지침서 탄생
  • 이성남 차장대우 ()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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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발원《민주시민 교육자료》… 능동성·토론·합리적 사고 강조

교통사고 세계 1위, 성폭력 세계 3위, 공공장소에서 소란행위 등 ‘어글리 코리안’의 모습은 국제 사회에서도 자주 들먹거려진다. 이 땅에 민주주의 교육이 도입된 지 50여 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에서 민주시민 의식이 실종된 모습을 아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이 손을 잡고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버젓이 건너가는 30대 주부나, 곡예하듯 무모한 운전으로 다른 운전자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20대 청년 등 이른바 민주교육 세대라 일컬을 수 있는 이들도 기본 질서의식이 없다.

 한국교육개발원은 한국 사회의 이같은 병리현상이 자율적 인간보다는 ‘정답형 인간’을 양산해온 과거의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했다고 인식하고, 이같은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실생활에서 규범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새로운《민주시민 교육자료》를 발간했다.

 한국교육개발원 곽병선 박사, 서울대학교 차경수 교수 등 70여 명의 연구진이 참여하여 89년부터 4년에 걸쳐 개발한 이 자료집을 다각적인 기초 연구조사를 거친 과학적 결과물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우선 기초연구로 미국 워싱턴 대학 사회학과 칼 츄니스 교수를 초청하여 ‘민주시민 교육에 관한 최신 연구 동향’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과 학부모, 교사와 성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 내용은 △우리 사회와 학교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 △현재 학교에서 실시하는 민주시민 교육에 대한 평가 △앞으로 민주시민 교육으로 길러야 할 바람직한  민주시민상 △민주시민 교육에서 강조되기 바라는 민주시민의 특성 등이었다. 이 조사 결과, 학교와 가정에 만연된 다양한 비민주적 생활 양태가 지적되었다(76~77쪽 표 참조).

유치원용에서 성인용까지 8종 14책
 이같은 연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1차 실험자료를 만들어 이것을 91년과 92년에 유치원 두곳·국민학교 두곳·중학교 두곳·고등학교 세곳 학생들에게 적용케 하여 그 실험결과를 최종 제작 과정에 반영했다. 91년 후반기부터는 교육부도 ‘민주시민 교육체계 연구사업’의 가치를 인정해 학술연구비를 지원했다.

 유치원용·국민학생용·중학생용·고등학생용·성인용 등 총 8종 14책에 이르는 이 자료집은 민주시민의 기본 핵심 정신을 △인간존엄 정신 △공공질서 의식 △민주적 절차 숙달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 등 네 영역으로 설정하고, 이를 구체화한 18개 기본 덕목과 세부 학습 요소를 교육대상별 수준에 따라 안배하고 있다. 국민학교에서는 기본질서 확립을 강조하지만, 상급 학교로 올라갈수록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키우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교과서가 채택하고 있는, 내용을 압축해 정선해온 방식에서 벗어나 교실 밖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토론을 통해 민주시민의 실체를 깨닫게 한다. ‘쓰레기 매립장을 어디에 세워야 할까’ ‘꽃동네 할아버지 최기동’(중학생용)이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발기선언문’(고등학생용) 등을 수정하지 않고 생생하게 제시함으로써, 졸업 후에 맞닥뜨리게 되는 냉랭한 사회 현실을 액면 그대로 인식하게 하는 기회를 준다. 예컨대 고등학교용 자료집에는 일간지가 보도한 아파트노조 파업 기사를 사례로 제시하여 ‘시민을 볼모로 한 파업’의 정당성 여부를 토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등학생용 자료집의 ‘시민의 책임’에 제시된 ‘맹구의 담배 피우기’가 담고 있는 내용은 맹랑하기까지 하다. ‘고등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단순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제시하고 현장을 관찰하게 함으로써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둘째, 토의·체험 중심의 수업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토론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곧 학습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의 사례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동료들과 함께 지혜를 짜모아 스스로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찾도록 하는 민주적 사고 훈련을 강조한다. 셋째, 합리적 사고기능 훈련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자료에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당면 과제를 토의 주제로 삼아 바른 이해를 촉진하고, 비판적 사고와 개방적인 태도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집단 과정의 훈련에 중점을 둔다.

 한국교육개발원 곽병선 박사는 “제 6공화국 출범 이후 국내외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민주화를 위한 좋은 여건을 맞이했다. 그러나 자제력을 잃은 개인과 집단의 욕구가 사회 전면에 분출하여 극심한 사회 갈등과 혼란상이 야기되고, 시민정신이 실종되다시피 한 현실을 보면서 이에 대한 교육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 자료집 개발에 착수했다”라고 발간 배경을 설명한다. 반정부 학생운동에서 드러난 편향된 사고방식과 이념 서적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사회 혼란을 부르는 극단적 집단이기주의, 산업 현장에 확산된 3D 현상 등은 그동안 총제적인 민주시민 교육을 등한히해온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연구개발팀은 과거 50년간 지속적 상명하달식 획일주의 교육이 국민으로 하여금 자율 해결 능력을 잃게 만들었다고 본다. 실제로 교실에서는 ‘인간은 존엄하다’는 민주주의 원리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교육 현장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에 지시와 복종 관계가 성립하고, 교사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만 편애하는 등 비민주적 요소가 무수히 절려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주시민 교육자료》는 수능시험 선생님
 곽병선 박사는 “민주시민과 비민주시민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타율적인 영향에 의해 좌우되는 비주체적 인간이야 아니냐로 가름된다”고 말하면서, 자율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교육개발원과 교육부가 모처럼 힘을 기울여 만든 이《민주시민 교육자료》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선 교육 현장에서 이 자료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연구 조사 기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학교 민주시민 교육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학교 풍토’와 입시 위주 교육‘이 지적된 사실을 상기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동안 학교의 민주시민 교육이 부진한 이유가 현행 입시 위주 교육 때문이라면, 올해 처음 실시된 대입수학능력시험은 《민주시민 교육자료》를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학력 평가 기준이 종래의 암기식 학력 평가가 아닌, 사고력과 논리력 위주로 전환되는 시점이므로 일선 교육현장에서 《민주시민 교육자료》를 적극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은《민주시민 교육자료》를 △기존의 도덕(초·중학교), 국민윤리(고등학교), 국어(초·중·고), 사회(초·중학교), 정치·경제, 사회·문화(고등학교) 과목의 보충교재로 △특활 및 학교 재량의 선택과목으로 △민주시민 교육을 위한 학교의 독자적인 교육계획으로 △성인용 자료집은 각 직장의 현직 연수 및 특별 연수 프로그램의 정신교육용으로, 《민주적 학생 지도와 학교운영》자료는 교원 연수 프로그램으로 △기타 일반 교양 독서물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李成男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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