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의 살아있는 死者
  • 런던·한준엽 통신원 ()
  • 승인 199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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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저자 루시디 아직도 ‘파트와’ 악몽 … ‘과대망상 환자’ 비판도



 8월11일 런던 교외 북서쪽에 있는 대형 스타디움 웸블리 광장에서는 에이레 출신 록그룹 U2가 야외 공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긴 뿔을 달고 악마로 분장한 리드 싱어 보노는 노래를 끝내자마자 갑자기 휴대용 전화기를 이용해 통화를 시도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가까이에 와있다."

 상대편 통화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 후 갑자기 무대 뒤편 어둠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노가 소개한 인물은 《악마의 시》작가 샐먼 루시디였다. 루시디는 “나는 두럽지 않습니다. 진짜 악마는 당신처럼 뿔이 달린 것도 아니고, 또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며 떨듯이 말했다. 모여있던 3만여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루시디가 이 야외 공연 무대에서 던진 말은 끊임없는 암살의 위험 속에 4년째 은둔과 방랑, 칩거와 도피를 거듭해온 그의 고난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루시디가 영국과 세계의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니는 아랍어 낱말이 있다. 파트와(FATWA). 이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호메이니옹이 지난 89년 2월14일 회교 율법에 따라 배신자 루시디와 그의 《악마의 시》를 출판한 자들을 제거하라고 전세계 회교도에게 명령한 암살 지령이다. 파트와는 호메이니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루시디는 파트와가 발표된 이후 초기에는 영국 정부가 즉각 개입함으로써 이란 정부가 이를 쉽게 취소할 것으로 낙관했다. 89년 2월14일 영국 정부가 비밀 경호 경찰을 파견해 루시디를 런던의 거주지에서 시골의 비밀 장소로 옮겼을 때만 해도 그는 이 도피행각이 계속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공포와 위협, 자신에 대한 연민과 혐오, 그리고 고독과 소외감 속에서 루시디는 지난 4년 7개월 동안 수없이 거주지를 옮겨가면서 도피 생활을 해왔으며, 지금도 그같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파트와 발표 4주년인 지난 2월14일 <선데이 타임스>에 실린 루시디의 글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악몽의 세월을 이렇게 표현했다. “4년이다.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내가 살아 있다고 자각하면 이상스럽게도 승리감과 함께 패배라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승리와 함께한 패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친구들이 나를 영원히 휴가중인 죽은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있는데도 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배감이 다시 나를 엄습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현상금 3백만달러로 올라
 그가 자기 심경을 언론에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란 정부는 파트와가 아직도 유효하며 취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테헤란 방송은 지난 2월14일 이란 회교의 정신적 지도자 하메네이의 말을 직접 방송하면서 “회교도의 길에서 벗어나 우리들에게 신성 모독으로 해를 끼친 그를 제거하기 위해선 그에게 접근이 가능한 회교도 형제들이 그를 제거해야 하며, 그것은 신성한 의무이다”라고 강조했다.

 루시디의 목숨에 현상금을 걸었던 이란의 회교도 재단 역시 그 액수를 3백만달러로 올리고, “올해가 바로 그를 제거해야 할 결정적인 시기”라고 루시디 암살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영국 정부는 루시디를 겨냥한 이란 정부와 회교 과격 테러단체의 암살기도 혐의를 아직 공식으로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런던의 외교 소식통들은 지난 92년 영국 정부가 런던 주재 이란대사관내 외교관 3명과 이란 학생 1명을 전격 추방한 것을 예로 들면서, 루시디에   대한 이란 정부의 집요한 암살 공작이 런던에서 당시 계획됐으며, 또 현재도 이같은 비밀 공작이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악마의 시》가 정작 이란내 회교원리주의자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루시디 사태는 정치·외교적인 협상으로만 쉽게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반루시디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일부 우익 지식인들은, 루시디가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과격하게 선동하는 ‘검은 살갗을 가진 영국인’이며, 거대한 회교 세계를 향해 홀로 칼을 빼어든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파트와 발효 4주년을 맞아 국제 여론은 압도적으로 이란 혁명정권을 향해 파트와를 공식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의 현정권이 회교원리주의에 따른 과격혁명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루시디는 언제까지나 ‘창살없는 감옥’에서 은둔 생활을 계속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런던·韓準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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