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장을 가다
  • 모스크바 - 바르샤바 · 진철수 부주필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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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열매 고대하는 모스크바의 겨울

생필품 태부족 … 경제난 극복 여부엔 이견 많아

 요즘도 모스크바 시민들 표정에 어둡게 그늘이 져 있는 것은 거의 매일 눈을 뿌리는 침울한 겨울날씨 탓만은 아니다. 민주화혁명이 동유럽을 휩쓸어 세상에 변화를 실감하게 하고 소련시민들이 언론의 자유를 전에 없이 많이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만성적인 소비물자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문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에스키모처럼 두툼한 옷을 입고 눈에 덮인 포도를 미끄러지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들. 이들의 발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생필품,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가정용품, 식품, 의류 등을 사기 위해 많은 시간을 밖에서 소비해야 한다. 그런 일들이 그들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크렘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르크스 대로에 자리잡은 초대형 어린이용품 백화점 데츠키 미르(어린이 세계)의 쇼윈도는 미제 인형들까지 곁들어져 제법 화려하다. 우주 비행사 차림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얼음과 눈으로 덮인 포도를 밟고 백화점으로 모여든다. 그러나 화려한 쇼윈도와는 달리 정작 안에서 팔고 있는 장난감, 의류, 스포츠용품 등은 재질, 색상, 디자인 등 어느 모로 보아도 몹시 초라한 물건들뿐이다. 그래도 매장마다 장사진이며 계단은 걷기가 힘들 정도로 붐빈다. 대체로 질서는 지켜지지만 새치기 때문에 잠시 소란해지기도 한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엇이든 사는 데 관심이 많고 줄을 서는 데 이골이 나 있다. 좋은 물건은 빨리 바닥이 나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물건을 사야 할 경우 대비해서 항상 주머니에 얼마만큼의 돈과 비닐백도 준비해 가지고 다닌다. 소비자의 부족상황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최근 모스크바에서는 설탕이 배급품목이 된 적이 있으며, 레닌그라드에서는 치즈가 동이 났었고, 다른 일부지방에서는 차가 배급대상이라는 말도 있다.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에 자극받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스크바 사람들이 정보에 몹시 목말라하고 있음을 도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지하철역을 지나다보면 신문을 사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모여들거나 줄을 지어 늘어선 광경을 흔히 본다. 사람들이 사들고 가는 신문은 별것이 아니다.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정치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문, AIDS 예방책을 다룬 신문 등 시중에서 팔고 있는 보통 일간지가 아니라 이를테면 특수 간행물이다.

권력체계 변화없이 경제개혁 어려워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 지도 4년이 넘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새해에는 개혁의 열매가 실생활에 도움이 될 정도로 나타나기 시작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사람들의 견해는 참으로 구구하다.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한 한인청년을 고르바초프 자신이 공산당 간부출신이기 때문에 개혁에도 한계가 있으리라면서 큰 기대는 걸기 힘들다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편 소비물자의 부족현상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되 새 경제체제가 자리를 잡으면 차차 상황이 호전되리라고 낙관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런가하면 경제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은 지방에서까지도 기득권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데에서 생산과 공급이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지적하는 언론인도 있다. 시사주간 <노보이예 브레미야> (신시대)의 블라디미르 쿨리스티코프는 정치개혁이 더 철저히 이루어져야만 된다고 주장한다.

 영어판 등 외국어판을 여러 가지 내고 있어 해외에도 꽤 알려진 <노보이예 브레미야>의 편집 부국장인 쿨리스티코프의 분석은 거침이 없다. 해결 방안은 “공산당이 자발적으로 권력에서 물러서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권력을 여전히 독점하고 있으며 종래의 권력체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개혁조치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신설된 인민대표회의만 해도 여러 가지 현안이 토론되는 광장으로서의 뜻은 갖지만, 결정 절차는 여전히 당을 중심으로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손에 들어있다고 그는 분석한다. 최근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타계했을 때도 인민대표회의 제2차 회의가 열리고 있던 중이었다. 사하로프 등 개혁세력은 헌법에 명시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인 제6조의 삭제를 총회에서 토의안건으로 채택하자고 제의했으나 표결에서 찬성 8백19, 반대 1천1백38, 기권 58표로 부결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보수세력의 강한 반발 때문에 주춤하여 개혁정책을 멈추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지만 쿨리스티코프는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계속 추진, 성공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그 이유는 그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말들만 많고 일은 게을리 한다”
 반면에 소련의 현상황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스위스계 회사에 근무하는 한 상사원은 “글라스노스트가 너무 일찍 왔다”고 말하면서 말들만 많아지고 일은 게을리 한다며 소련사람들을 비난했다. 서방측 실업인들로서는 페레스트로이카시대라고 떠들기만 했지 관료적 병폐는 여전하여 일의 진행이 힘드니까 더 원망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글라스노스트의 자체도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과감한 보도와 개혁을 지지하는 논조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모스코 뉴스>(주간)가 최근 지적한 것만 봐도 그렇다. 소련의 일간신문들이나 텔레비전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내용이나 기자회견 같은 중요기사의 보도에 있어서 외국 언론기관보다 하루 이틀 늦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제대로 옮기려는 노력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루지야공화국 트빌리시에서 얼마전에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한 사건이 있었으나 소련 언론기관들이 그 사실을 즉각 보도하지 않았던 것을 하나의 예로 지적하고 있다. 최근 사하로프 서거 때만해도 <프라우다>등에 실린 부음기사는 그가 과감한 개혁론자였다는 것과 과학자로서 공이 컸다는 말은 했지만, 억압받는 자를 위한 인권투쟁을 벌이느라 얼마나 애썼으며, 또 그가 당국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왔다는 점은 얼버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세가지 측면 중에서 글라스노스트는 큰 진전이 있고 정치적 민주화 측면에서도 당이 조종하지 않는 정상적인 선거를 도입하는 등 상당한 진전이 있으나 경제적 측면에서만은 여전히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다. 쿨리스티코프가 말하듯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주의도 장애요인이지만, 다른 문제들도 있다. 그동안 경제개혁조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각 기업의 생산계획은 아직도 대부분 중앙관서의 ‘국가 발주’에 의존, 종래 방식을 따르고 있는 설정이며, 기업의 자주권 확대는 실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중앙관리 체제에서 탈피, 자유시장체제로 과감한 개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뉴욕타임스>는 최근 이 문제에 관해 동정적인 분석을 내리고 있다. 첫째, 관료주의에 얽매어 있는 경제를 풀어서 새로운 시장체제로 이행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의 근거로 삼을 경제이론도 없고, 경험에 바탕한 모델도 없다는 것이. 둘째로, 물가를 풀어놓았을 때 소련 시민의 생활이 위협 당할 뿐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정치생명도 위험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국방비를 삭감하고 군수품 생산을 줄임으로써 소비재 생산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등 고르바초프는 물가개혁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개혁을 시행하자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서방측의 경제 협력도 필요하다는 것이 이 신문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경제개혁에 미온적인 것은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크렘린의 보수세력에 끌려서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소련의 개혁주의자들은 개인의 재산소유권과 개인기업의 자유를 완전히 인정하는 대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소련이 시장경제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인데 고르바초프는 그러한 일을 해볼 용기가 없다고 평하고 있다.

 한편, 고르바초프의 장래를 전망할 때 경제문제도 심각하지만 소수민족들의 주장으로 벌어지고 있는 분쟁 · 파업 등의 사태가 더욱 심각하다고 보는 서방측 관측자들이 있다. 소수민족의 요구나 국민의 소비생활에 관한 불만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마당에서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를 집어치우고 강권통치로 후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 문제와 관련, 일본의 소련주재 대사 무토 도시아키(武藤利昭)씨는 최근 <요미우리> 신문 좌담회에서 고르바초프의 앞날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전망내리고 있다. “구체제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해서 모두 페레스트로이카라는 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격이다. 그러다가 폭풍이 심해서 배가 엉망이 되었다. 좀 멀리 우회해보자느니, 폭풍이 지날때까지 기다리자느니 배 속에서 갑론을박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사람도 구체제 쪽으로 되돌아가자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또 선장인 고르바초프가 신통치 못하다고는 하지만 일부에서 ‘우로 가라’ ‘좌로 가자’는 불평이 나올 뿐이지 대신 키를 잡겠다고 나서는 이도 없으며 그럴 만한 인재도 없는 상황같다.”

시간은 고르바초프를 기다려 줄 것인가
 고르바초프는 최근 <프라우다>에 실린 논문에서 다원주의를 역설하면서도 “현재의 역경을 뚫고 나가자면 모든 세력을 결집시키는 1당체제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당지배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경쟁원리를 경제에 적용시키는 개혁이 관철되기는 어렵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아카는 동유럽 제국에서 국민의 욕구를 억지로 누르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는 헝가리 · 폴란드 등에서 소련을 앞질러가는 대담한 개혁을 시도하게 하였는바,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고르바초프를 기다려 줄 것인가. 소련은 대국이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동유럽 제국에서처럼 ‘피플 파워’를 발휘시켜 정치를 바꾸게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도 하지만, 소련 사람들이 언제까지 무한정 기다려 줄 것이지, 적어도 고르바초프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것인지는 물론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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