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구 국무회의 시국 ‘만성 불감증’
  • 박준웅 정치부 차장 ()
  • 승인 199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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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권 없어 ‘들러리’… 大사건 상정안건에서 빠져

 잇따른 대학생들의 분신자살로 위기감마저 감돌던 ‘5월정국’ 벽두인 3일 오전 8시, 제1정부종합청사 10층 국무회의실에서는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는 운영원칙에 따라 언론의 사진촬영조차 허용되지 않은, 철저한 비공개였다. 몇 안 되는 취재기자들이 중앙기자실에서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께 끝이 나자 곧이어     공보처장관 겸 정부대변인이 중앙 기자실에 들러 회의내요을 간추려 설명했다.

 최장관은 “회의 처음 李相  내무와     환경처 두 신임장관의 인사가 있었다.     국무총리는 내무장관에겍 ‘내무부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변신해야 할 부처’라고, 환경처장관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탄생해야 할 부처’라고 각각 당부했다”고 말한 후 브리핑을 시작했다.

 먼저 이내무장관의 명지대 사건과 관련한 발언 부분이 발표됐다. 이장관은 이 자리에서 최근 사태의 경과보고와 현황, 그리고 사과 표명에 이어 △경찰의 교육강화 △지급된 장비와 장구 이외의 취득물사용 절대금지 △사복조(속칭 백골단)운용 억제 △최루탄 사용의 가급적 자제 등의 시위현장 안전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장관은 전반적인 시위방법 개선책을 마련중이라면서 건전한 시위문화 정착을 위해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기획단을 구성하고 △연행과정에서의 폭언을 금지시키며 △사복조의 복장을 전투경찰의 공식 작업복으로 바꾸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동대가교내 진입ㅇ르 하지 않도록 하고 △앞으로 방송차량을 동원해 최루탄 발포시 산전에 “발사하겠다”고 알리며 △특히 노약자와 일반시민을 보호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뒤이어 노총리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의 뜻을 표명한 뒤 자신의 생각을 몇가지 밝혔다. 그는 “시위에??? 폭력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면 전경이 출동한다. 그러다가 ‘전쟁심리’로 서로 부딪쳐 싸우게 되는데, 이런 가운데 사건이 일어났다”면서 “그렇다 하더라도 법과 질서가 유지되고 공권력이 유지돼야 한다. 공권력은 국가가 해야할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임무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 “과거에는 시위 자체가 폭력이든 시위든 용납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위가 민주생활의 일부이다. 각 부처는 정책수립 과정에서 이런 시대적 요구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말했다. 노총리의 시국인식과 대처자세를 읽을 수 있는 말이다.

중대문제는 ‘안가회의’에서 다뤄
 브리핑은 李   상공부장관의 최근 미국방문 결과에 관한 보고내용을 끝으로 마쳤다. 이날 회의에 상정된 안건은 중소기업 사업조정법 시행령 개정안과 내녀도 일반회계 예비비 지출안 등 일반안건 6건뿐이었다. 명지대   大군 치사사건과 관련된 토의는 안건에서 빠져 있었다.

 시국의 심각성 때문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고 이날 국무회의 취재에 열을 올리더 ㄴ기자들의 표정은 차츰 식었다. 서울 삼청동 인가에서 노총리 주재로     안기부장, 이내무, 李  南 법무, 丁 昌 청와대비서실장 등이 참석한 비공식긴급시국대책회의가 그 하루 전 오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날 국무회의는 정례회의에 그칠 공산이 컸다.

 “앞으로 사보조만 대학에 투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모든 전경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백골단의 해체와 관련이 있느냐”는 등의 기자들의 질문에 최장관은 “전경을 가급적 투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한 기자는 “지금까지는 가급적 투입했는데 지금부터는 가급적 투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로구먼” 하며 빈정거렸다. 굵직한 뉴스를 찾는 기자의 생리상, 이날 국무회의는 ‘별볼일 없다’는 푸념인 셈이다.

 이런 실망이 유독 이날의 국무회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국무회의가 언론의 기사거리 제공을 위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국무회의가 맥빠진 취재대상이란 것은, 그만큼 정권의 ‘들러리’ 정부 법안처리에 ‘방망이 두드려주기’나 부처간의 이견조정 역할 등에 그쳐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뜻 하기도 한다. 현행 헌법이나 법률상 그럴 수밖에 없는 면도 있다.

 국무회의는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하며, 대통령 · 국무총리와 15인 이상 30인 이하의 국무위원으로 구성한다(헌법 제88조). 대통령은 국무회의의장으로서 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주재하며, 의장이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행할 수 없을 때에는 부의장인 국무총리가 대행하고, 둘 다 사고일 때에는 부총리가 대행한다(정부조직법 제12조). 또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 · 감독한다(정부조직법 제15조).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헌법 제86조). 각부 장관인 국무위원도 국무총리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국정을 심의한다(헌법 제87조)

대통령이 주재하면 ‘최고정책결정기구’
 이런 규정들을 살펴보면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라는 정부 최고정책기구는 묘한 위상을 갖고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할 때에는 최고정책결정기구가 되지만, 국무총리가 주재하면 최고정책심의기구로 대통령의 정책참모기관에 그치게 된다(  世〈한국의 정책결정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국무회의가 언론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은 정부조직상 높낮이에 큰 차이가 있지만, 국무회의 석상의 대통령 앞에서는 사실상 동렬에 머물게 되어 있다(   《한국행정학》). 또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대신해 대부분의 국무회의를 주재하지만, 국무총리는 고유 업무가 없고 국무총리나 국무위원 개개인이 대통령의 명을 받게 되므로 국무총리의 실질적인 정책결정기능은 발휘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특히 3공 이후 청와대비서실의 기능확대와 대통령비서관들의 정책결정 독점으로 더욱 그러하게 되었다(朴命 《한국행정론》).

정권말기엔 위기관리 능력 한계
 이런 탓에 국무회의는 요즘처럼 중대한 시국에서는 범정부적인 대처능력을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유신말기인 지난 79년과 5공말기인 87년에 확인되었듯이 정권말기에는 위기관리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현 국무회의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 24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법제처장 국가보훈처장 국가안보상근위원 서울특별시장 국무총리비서실장 및 행정조정실장이 배석하도록 되어 있다. 청와대회의 때 대통령직속기관장인 감사원장 대통령비서실장 구가안전기획부장이 추가로 배석한다. 개의 정족수는 과반수인 14인이며, 의결 정족수는 출석원의 3분의 2이상이다. 국무회의는 수요일마다 열리는 정례회의와 임시회의로 구분된다.

 국무회의가 ‘들러리’에 그친다는 지적에 대해 국무총리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국무회의를 지켜보면 그렇치만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매우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과거의 국무회의르 생각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6공 들어 국무회의가처리한 의안 처리실적을 보자. 첫 총리인 李賢  내각(88년 2월26일~12월4일)하에서는 45회가 열려 모두 4백88건의 안건을 처리했다. 안건별로 보면 일반 안건이 2백24건(45.9%)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대통령령안 1백60건(32.8%) 법률안 71건(14.5%) 보고안 17건(3.5%) 공포안 16건 순으로 나타났다. 일반안은 국무회의에서 중점 심의되어야 할 주요 정책, 외국과의 협상 또는 조약체결 등의 사안이며, 대통령령안은 국회에서 입법된 법률의 시행령을 말한다. 법률안은 정부가 국회에 낼 각종 법안이다. 이 기간중 국회청문회 설치 입법과 관련해 국회가 요청한 두 안건을 거부했다.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안 재의요구안과 국회에서의 증언 · 감정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 재의요구안이 바로 그것이다.

  英  총리 시절(88년 12월5일~90년12얼27일)에는 1백20회가 소집돼 1천8백44건을 처리했다. 안건별로는 대통령령안이 6백96건(37.7%)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안 6백20건(33.6%) 공포안 2백88건(15.6%) 법률안 1백95건(10.6%) 보고안 41건 순이다. 강총리 임기 동안 거부된 안건은 80년 해직공직자의 복직 및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안과, 지방자치법 · 국민의료법 · 노동조합법 · 노동쟁의조정법 등 4ㅐ 법률 중 개정법률안 재의요구안 등 모두 5건의 국회요구안을 거부했다. 이런 안건 거부는 모두 여소야대 국회하에서인 89년 3월 이전에 집중되어 있다.

 90년 한해 동안 처리된 안건 9백9건 중 원안대로 의결된 것은 8백30건이며, 수정건은 79건으로 수정비율은 9%였다. 이 수치를 보면 국무회의를 방망이만 두드리는 요식절차 기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중심제에 내각제의 요소가 많이 가미된 현행 정부형태를 감안하면, 국무회의는 사실상 내각정부의 최고정책의결기구로서 그 여할을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국무회의는 각 부처의 법률안을 처리하는 ‘ 법안 회의체’에 불과하거나, 국회가 의결한 개혁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행 회의체’라는 비난을 받는 일면이 있다.

 정국이 경색될 때면 정부의 정책결정과 운용에 탄력성이 크게 요구되어왔다. 이럴 때일수록 합의체 형식인 국무회의의 역할이 기대된다. 합의체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참석자의 뜻을 모을 수 있고, 조직의 민주성과 창의성이 반영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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