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무시한 특별소비세
  • 김상익 차장대우·장영희 기자 ()
  • 승인 199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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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 개편하며 세탁기에도 신설 … 과세편의주의 일관, 소비자 목소리 실종

돈많은 재벌 총수가 용량 6.6㎏짜리 세탁기를 살 때는 값이 53만원이었는데, 소녀 가장이 세탁기를 살 때는 66만원으로 값이 13만원이나 뛰어오른다면,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재무부의 세제 개편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통과된다면 우리는 이같은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동안 용량 6㎏ 이하의 소형 세탁기에는 특별소비세가 20%나 부과됐지만 대형 세탁기에는 특소세가 없었다. 재무부는 9월1일 세제 개편안을 마련하면서 이같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소형 세탁기의 세율을 15%로 낮추고 대형 세탁기에는 20%의 특소세를 새로 부과했다. 겉보기에는 ‘형평’이라는 외양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형평을 위한 세율 조정이 더욱 불공평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가전업계
 92년 한 해 동안 세탁기는 국내 시장에서 모두 5천1백29억원어치 팔렸다. 같은 해 세탁기에서 거두어들인 특소세는 58억원에 불과했다. 세탁기 품목에서 특소세가 거의 안 걷힌 이유는 과세 대상인 소형 세탁기가 멸종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무부의 세제 개편안은 세탁기의 경우 사실상 있으나마나였던 특소세를 새로 만든 셈이다.

 가전 제품에 대한 특소세를 없애거나 세율을 낮추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가전업계는 이번에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꼴이 됐다. 한국 전자공업진흥회 朴在麟 이사는 “현재 세탁기 보급률이 85%에 이르는데 나머지 15%인 가장 어려운 계층이 구입하려고 할 때 철퇴를 안긴 셈이다. 대형 세탁기에 특소세를 매기겠다는 것은 중대한 실책이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부도 가전 제품에 대한 특별소비세 부과가 말썽이 많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무부 金容珉 소비세제과장은 “가전 제품의 주종인 냉장고, 컬러 텔레비전, 세탁기가 대중화됐다고 해서 특별한 사유가 없고 세수 여건이 좋지 않은 때 이들에 대한 특소세 부과를 없앨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92년 특소세 징수 실적은 3조6백86억원인데 이 중 가전 제품(5천7백억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18.6%에 이른다. 따라서 세수를 확보해야 하는 재무부로서 가전 제품은 쉽사리 손 놓을 품목이 아닌 것이다.

 세제 개편안을 두고 정부와 기업이 이처럼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세금을 납부하는 소비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기업이 생산의 주체라면 가계는 소비의 주체이며, 이들 소비의 주체는 물건을 사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알게 모르게 세금(간접세)을 낸다. 92년에 징수한 국세 35조2천1백84억원 중 간접세(15조1억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2.6%에 이른다. 이는 소득세 법인세 토지초과이득세 상속세 등 직접세 14조5천7백34억원보
다 많은 액수다.

 간접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부가가치세(이하 부가세)와 특소세이다. 정부는 77년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하면서 이의 역진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특소세를 만들었다. 부가세는 부자에게나 가난한 서민에게나 무차별로 10%의 세금을 물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유층이 많이 소비하는 품목에 대해 특소세를 매김으로써 가진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하여 형평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커지고 소비유형이 바뀌면서 현재 특소세는 역진성을 더욱 크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崔 洸 교수(한국외국어대·재정학)는 “분배 정의의 관점에서 세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반적인 세 부담의 역진성에 있다. 전체 세수에서 간접세의 비중이 높은 점, 종합소득세제가 정착되지 않은 점, 재산세 기능의 미약, 재산 및 사업 소득에 대한 조세 감면의 집중,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역진적 세 부담을 시현하는 특소세 등 한국의 세제는 소득과 부의 분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부가세 개선안에도 구멍
 부가세는 사업자가 아닌 소비자가 내는 세금이다. 사업자는 단지 물건을 팔 때 소비자로부터 미리 세금을 받아두었다가 국세청에 이를 납부할 뿐이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업자는 소비자가 낸 소비세를 마치 자기 돈인 것처럼 여긴다. 즉 1백원짜리 물건을 각종 간접세를 포함해 1백50원에 팔고, 부가가치세와 특별소비세가 30원이라면, 사업자의 소득은 20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마치 50원 전부가 자기 소득인 것처럼 간주해 세금을 납부할 때 소비세를 억울하게 떼이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타당한 이유는 있었지만 과세특례자 등 ‘예외’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영수증을 떼지 않고 국세청에 실제 매출액보다 적게 신고함으로써 세금을 가로채는 탈세가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현재 부가세 납세자 2백10만명 중 62.9%인 1백32만명이 2%의 세율을 적용받는 과세특례자이다. 이번의 세제 개편안 대로라면, 이들 과세 특례자의 47%인 63만명은 단 한푼의 부가세도 내지 않게 된다.

 재무부가 세제 개편안 중 ‘한계세액공제제도’라는 희한한 제도를 신설한 것은 이같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 제도는 연간 매출이 3천6백만원이 안되는 사업자 중에, 그동안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 과세 자료 없이 거래를 하면서 소비자로부터 미리 받아놓은 세금을 국세청에 납부하지 않고 그 돈으로 사업을 지탱해온 영세 사업자들이 실명제 이후 세 부담이 늘어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조세 당국은 이들이 실명제라는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도 계속 살아남아 점차 일반 과세자로 변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소비자는 지금껏 그래왔듯 더욱 세금을 맡이 물어야 할지 모른다. ‘생선 가게의 고양이’인 사업자들이 이를 가로채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 수입이 예상만큼 안 걷히고, 그 차액은 결국 소비자에게 세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일반 국민은 실명제가 실시됐기 때문에 그동안 납세의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 도망치던 사람들의 세원이 백일하에 드러나 세율이 더 낮아지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실명제로 인한 세수 확대가 얼마나 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재무부는 이번 개편안에서 우선 부가세 부문에서 10% 남짓이 양성화될 것으로 보고 전체적으로 세율을 소폭 낮추었다. 재무부 관료들의 지적대로 비뚤어진 납세 관행이 바뀌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조세수입을 책임지고 있는 재무부로서는 실명제 실시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적자 재정이 염려되기 때문에 특소세나 소득세를 급격히 줄일 수 없다는 속사정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개편안의 세율 조정은 손 안에 쥔 먹기 쉬운 떡을 놓지 않겠다는 ‘과세 편의주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예컨대 조세 수입이라는 명분 아래 소비 형태가 변화한 현실에 맞추어 특소세 대상 품목을 바꾸는 작은 개혁조차 미루었다. 재무부는 세제 개편을 통해 소득세·법인세 등 직접세에서는 5천억원을 깎아주는 대신, 휘발유 특소세 등 간접세를 중심으로 1조5천억원을 더 거둔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한국조세연구원 成明宰 전문연구위원은 “세제는 현실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특소세만 해도 과거에는 역진성을 보완하는 데 중점이 두어졌지만 요즘은 외부 불경제를 막는 데 더 큰 뜻이 있다”라고 말했다. 즉 휘발유 등 유류에 특소세를 높게 부과하는 것은, 유류 사용으로 인한 공해 문제(외부 불경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비용을 원인자 부담 원칙에 따라 물리고 에너지 사용을 억제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원칙적 주장에 비추어볼 때도 이번 개편안은 자체 모순을 드러낸다. 한 예로 특소세가 도입된 77년 당시에는 공해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이유로 ‘교통세’를 신설한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같은 논리가 받아들여진다. 반대로 77년만 해도 가전 제품에 대한 특소세 부과가 설득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이번의 세제 개편안은 외면하고 있다.

 경제 활성화라는 ‘신경제’의 절대 명제는 투자 확대와 생산 증대를 유도하기 위해 법인세 인하 같은 생산자 우위의 세제 개편안을 내놓았다. 반면 소비자에 대한 세금 줄이기가 소비 지출을 늘려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논리는 실종되어 버렸다. 한국 경제에서 소비자라는 경제 주체는 거의 묵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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