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테랑 부인 다니엘 여사 “인권은 국익에 앞선다”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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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오늘

■ 프랑스 대통령 방한
미테랑 부인 다니엘 여사 “인권은 국익에 앞선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76)의 한국 방문은 1886년 쇠락한 조선 정부와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프랑스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다.

 그렇다고 두 나라 사이에 정상회담으로 풀어야 할 현안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5공 때부터 계속된 한국 정부의 초청을 명분과 실리를 저울질하며 미뤄오던 프랑스 정부가 마침 고속철도 선정이 끝난 ‘좋은 시기’를 맞아 이때다 하고 방문 일정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문은 미래 지향적인 동시에 과거 회고적이다.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낡은 정치인으로 대접받는다. 그는 95년 실시할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탈냉전 이후 정치 지도자 세대교체라는 엄청난 조류를 감당해야 할 형편이다. <르 피가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테랑 대통령의 인기는 88년 7월 63%에서 금년 7월 37%로 급락했다. 발라뒤르 총리가 68%의 지지를 얻으며 대중적 붐을 일으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문가들은 95년 선거를 앞둔 프랑스 정국을 이행기로 간주한다. 우파 진영의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락, 레이몽 바르 트로이카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사회당 정권에 대한 효과적인 반격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미테랑이 과거 드골이나 독일의 아데나워가 그런 것처럼 국민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기는 힘들 것 같다.

 미테랑 대통령이 사회주의자가 된 데에는 부인 다니엘 여사(69)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두
사람은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만나 결혼했다. 열렬한 사회주의 신봉자인 다니 엘은 사회당 국제위원회를 통해 중남미의 혁명운동 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와 쿠르드족을 지원하여 중국과 이라크 정부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엘리제궁에 들어간 뒤에는 프랑스-리베르테(자유 프랑스)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인류적 문제로 활동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그는 방한에 앞서 한국 언론에 보내온 소개서에서 “이데올로기는 왜곡되어 버렸고 권력은 메말라버렸으며 국제 기구는 마비 상태이다. 프랑스-리베르테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분출하는 인간의 근본적 가치에 대한 주장을 옹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권은 국익에 선행한다”며 프랑스 해외 영토 원주민들의 입장을 지지하여 프랑스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무신론자인 다니엘 여사를 만난 테레사 수녀는 자기 묵주를 걸어주며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이 묵주를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중동평화협정
노르웨이 외무장관 ‘정직한 중재’ 결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에 중동평화협정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노르웨이의 요한 요에르겐 홀스트 외무장관(55)의 힘이 컸다. 홀스트 외무장관은 오슬로에 있는 자기 저택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 간의 열네 차례에 걸친 회담을 중재했다. 그 때문에 얼마 전까지 그는 비밀 외교에 치중하는게 아니냐 하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막후 중재 노력에 힘입어 중동평화협정이 탄생하자 그에 대한 비난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홀스트 장관은 “한때 회담이 결렬 상태까지 가기도 해 몇주간 잠을 제대로 못잤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그의 노력이 평가돼 그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평생 외무장관이 소원이던 홀스트 장관은 지난 4월 유엔의 유고 평화 중재역으로 자리를 옮긴 소발드 스톨텐버그 장관의 뒤를 이어 그 꿈을 이뤘다. 홀스트 장관은 노르웨이가 중동평화회담의 중재역을 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노르웨이가 ‘정직한 중재자’라는 인식을 심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르웨이는 80년대 말부터 이스라엘 점령지내 팔레스타인 난민의 생활 편의를 위해 일련의 연구 계획을 세우는 등 평화 애호국으로서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애써 왔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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