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잠재울 ‘민족의학’ 육성
  • 이성남 차장대우 ()
  • 승인 199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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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방 협진 체제 바람직 … 진료·조제권 영역 분명히해야

지난 9월8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한의학 집회에서는 ‘김영삼 대통령께서도 약사의 한약조제를 분명히 반대했다’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이 나왔다. 이 유인물은 76년 당시 김영삼 이기택 최형우 황명수 박영록 의원 등 56명이 ‘약사가 한약을 임의로 조제 또는 혼합판매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동서 의약을 분리해 균형 발전토록 해야 한다’는 내용에 서명 결의한 사실을 공개하고 있다. 한의학계가 17년 전의 김영삼 대통령 서명까지 들추는 배경은, 식민지 시절 이후 지금까지 당국의 정책 배려를 전혀 못받은 데서 오는 깊은 소외감을 반영하고 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은 ‘한·약 분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지난 3일 보사부가 발표한 약사법 개정시안은 오히려 ‘분쟁’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위기 국면으로 몰고갔다. 관련 단체 대표, 소비자 대표, 보건 전문가 등 각계 의견을 수렴하여 보사부가 절충안으로 내놓은 개정시안은 양쪽으로부터 모두 거부당했다.

근본 문제점 그대로 남아
 한의과 대학생 3천명 유급 사태와 전국 약사들의 집단 휴업 등 혼미를 거듭하는 극한 대립 속에서, 이 개정시안은 두 집단의 싸움을 진정시키기는커녕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어, 전국 약사의 면허증 반납과 한의학 살리기 범국민대회 개최 등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정부는 지난 6일 황인성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열고 약사법 개정 시안을 둘러싼 양측의 집단반발에 대해 ‘강력 대응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회의에는 한·약 분쟁의 씨앗을 뿌린 보사부와, 그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육부장관 외에도 이경식(경제 부총리)·이해구(내무부)·김두희(법무부)·오인환(공보처)·김덕룡(정무 1)·황길수(법제처) 장관들이 참석하여, 뒤늦게나마 정부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 8일에는 송정숙 보사부장관이 ‘국민 보건을 볼모로 한 집단 행동에 의하여 정부 시책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강경 대책으로 두 집단의 자존심이 걸린 이권 싸움의 기세는 일단 수그러지는 듯하다. 그러나 전국 한의과대학 학생들의 유급 및 전국 약사들의 면허증 반납 등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한 근본 원인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싸움은 언제라도 재연할 소지가 있다.

 여론은 7개월을 넘게 계속돼온 볼썽사나운 싸움을 지켜보면서 ‘밥그릇 때문에 직업 윤리조차 저버리는 집단이기주의의 표상’이라며 두 집단을 나무라고 있다. 이같은 피상적인 양비론은 한의학과 약학이라는 전문 영역에 대한 전문 식견이 모자라는 국민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양측이 국민 건강을 앞세워 제시하는 그럴듯한 명분에 대해서도, 일반 국민은 그 주장이 담고 있는 의미의 허실을 냉정히 따지기보다는 막연한 동정론 또는 피상적인 양비론으로 치우치기 십상이다.

 두 집단을 향한 국민의 눈총은 의당 보사 당국으로 쏠려야 한다. ‘약국내 재래식 한약장’이 상징하는 의미를 처음부터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던 보사부는, 한의학 관련 단체와 공청회 한번 열지 않은 채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또 지난 2월25일 안필준 전 보사부장관이 퇴임 이틀을 앞두고 약사법 개정안을 어물쩍 통과시킨 사실에 분개한 한의학계가 3월초 과천종합청사 앞에서 처음 시위를 시작했을 때 보사 당국은 ‘재래식 한약장 삭제’파장의 여파를 충분히 검토했어야 했다.

 또 전국 한의과대학 학생들에 대한 유급 사태에 직면해 내놓은 보사부 개정시안이 양측으로부터 모두 거부당한 까닭은 무엇인가. 특히 그동안 한약을 조제해온 약사의 기득권을 인정한 ‘부분 허용’ 부분은 ‘사실상 약사의 진료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한의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약사법 개정안 다시 손질해야
 한의학계는 “약사의 한약 조제는 일종의 무면허 의료행위”라고 의료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겸업 약사들은 “수십년간 아무 문제 없이 한약을 조제·판매해 왔는데 새삼스럽게 자질을 문제삼겠다는 것이냐”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국민 입장에서도 궁금증이 있다. 약국에 한약장을 들여놓은 약사라면 지정 한약재 50~1백종에 한해서는 ‘한의사와 동일한 자격으로 취급해도 안정성에 문제가 없는가’ 라는 점이다. 최근 보사부가 ‘기득권을 인정하는’ 개정시안을 발표하자, 약사들이 중고 한약장을 불티나게 주문한다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약사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국민의 한방 이용도는 불과 4.3%인 데 비해 약국 이용도는 40%가 넘는 만큼 약국이 국민보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따라서 보사부는 ‘부분 허용’ 의미를 정확하게 명시하고, 만에 하나 이 조처로 약화 사고가 일어날 경우 전적으로 책임질 각오를 해야 한다.

 한의학계가 유인물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일관성 있는 정책을 촉구한 8일 주경식 보사부차관이 새로 임명되었다. 한의학계는 주차관이 “이번 사태의 불씨인 약사법 개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시점에 그를 중용한 현정부에 아쉬움을 표명했다.

 한의학계의 이같은 민감한 반응은 ‘보사부는 언제나 약사회 편’이라는 뿌리 깊은 피해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한의학계의 응어리진 피해 의식을 풀어주고, 또 국민으로부터 쏟아지는 ‘편파 행정’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국은 무엇보다도 ‘민족 의학’을 표방하고 있는 한의학에 대한 보호육성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모택동 집권 당시 ‘赤脚醫生’, 곧 맨 다리로 전국의 환자를 찾아 헌신적으로 뛰어다닌 한의사의 공로를 인정하여 중의와 양의 협진 체제를 조화롭게 구축한 중국의 의약제도를 연구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중국은 행정관리 체계, 의료기관 형태, 교육제도는 중의와 서의로 분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중·서의가 통합된 체제이다. 교과과정에서도 중의 학원에서는 7:3(중:서)비율로, 서의 학원에서는 3:7(중:서) 비율로 나누어 학습시키며, 졸업후 실제 임상에서 다른 분야 의료 행위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최근 보사부가 한의학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방 의료보험 확대, 한약재 가격 등 관리개선, 한의사 공중보건의 제도, 의약분업 같은 숙원 과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니 일단은 지켜볼 일이다.
李成男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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