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판 담당 대법원 판사 인터뷰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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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재판개입 계획적이었다"

김재규 일행에 대한 10.26 사건 관련 재판은 사법부의 수모와 궤를 같이했다. 80년 10.26 사건 재판 당시 신군부가 대법원 판사들에게 행사한 압력을 뿌리치고'김재규를 내란 목적 살인범으로 볼 수 없다'는 법논리를 펼쳤다는 이유로 5명의 대법원 판사가 보안사에 의해 강제 사직당해야 했다. 그들중 선임자였던 양병호 전 대법원 판사에게 당시 재판의 문제점을 들어 보았다.<편집자>

10 . 26 사건 재판 당시 김재규 일행을 내란 사범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던데.
대법원 판결은 항소 법원의 기록에 의존한다. 고등군법회의에서 넘어온 자료 어느 구석을 훑어봐도 김재규 일행이 내란을 꾀했다는 법적 증거가 없었다. 김재규.김계원 피고의 진술을 종합해보고 그밖에 군법회의가 첨부한 모든 증거를 샅샅이 살펴도 일반 단순살인죄 적용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대법원 판사 6명이 내란목적 살인죄는 증거불충분이므로 다시 되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김재규씨 주장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유신 정권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박대통령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헌법기관인 대통령직의 중요 임무를 포기하고 민주화 말살에 앞장선 인물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 장애물인 자연인 박정희를 제거해야 했다는 주장을 폈다. 이 주장은 법리적으로 내란을 꾀한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내란죄는 원래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폭동을 해야만 적용이 가능하다. 적어도 수십명의 공범자가 의사를 합치해 폭력을 동원한 조건이 객관적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10.26 사건은 김재규가 박선호.박흥주 등 부하에게 사건 직전에 얘기했다는 내용뿐이었다.

당시 전두환씨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재판에 영향을 행사했나?
제가 보기에 그들은 미리 죄명을 내란 목적으로 정해놓고 의도적으로 재판에 개입했다. 당시 보안사 중령이 대법원에 드나들면서'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다녔다. 한번으 ㄴ그 중령이 나에게 찾아와'보안사의 2인자 격인 분이 판사님을 찾아오기로 했으니 의견을 들어달라'고 했다. 그 뒤 키가 아주 크고 몸이 굵은 40대 군인이 들어와'조용한 요정으로 모실테니 가자'고 했다. 나는 대법원 판사실보다 더 조용한 곳은 없을 거라며 안간다고 끝까지 버티었다.10.26 사건은 3부 재판이었는데, 내가 제일 선임자라 나를 유혹해서 의도대로 완전무결한 결과를 끌어내라고 했던 것 같다.

여섯 분의 대법원 판사가'내란죄 불성립'을 주장했지만 나머니 여덟분이 상고기각 결정을 내려 사형이 확정됐는데.
내가 보기에 그 어수선한 시국에서 군부가 판결을 재촉하는 바람에 기록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분이 많았던 듯하다.

재판이 끈난 후 불이익은 없었는가?
그해 8월초 보안사에 연행됐다. 보안사 요원은 소수의견을 낸 6명중 민문기.임항준.김윤행.서윤홍 판사 등 다른 분들이 다 사표를 냈으므로 나도 사표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직 대상에서 정태원 판사를 뺀 것은 당시 정판사가 해외에 나가면서 다른 다섯 판사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세줄로 짤막하게 의견을 냈는데 그같은 정상을 참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대법원장을 한번 만나겠다고 버티었지만 그들은 사표를 내기 전에는 풀어 줄 수 없다고 협박했다. 결국 보안사 요원에게 사표를 써주고 나왔다. 그 뒤 변호사 개업도 못하게 방해 공작을 펴 2년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재판 결과를 되돌아볼 대 어떤 아쉬움은 없는가?
군부가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만일 소수의견이 다수 의견이 돼서 군법회의의 판결이 깨졌더라면 고등군법회의에서 다시 조사를 했든지 일반 살인으로 고쳐나와 대법원 재판을 다시 했을 것이다. 김재규의 운명은 일반살인죄를 적용하더라도 당시 시국 분위기로 보아 사형으로 갔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나'민주 회복을 위해 그런 살인을 했다'고 돼서 김재규 일행의 행위는 청사에 길이 남았을 것이라고 본다.

10 . 26 사건을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저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뒤집을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평가는 기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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