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 개혁 '피의 장애물'넘었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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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래 보.혁 간에 최악의 유혈 충돌을 빚은 러시아 사태는 군부를 장악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단호한 진압 조처로 수습 국면에 들어갔다. 이번 사태는 연방이 와해된 뒤 정국 주도권을 놓고 극한 대결을 벌여온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위 오른쪽 사진 맨 왼쪽)을 정점으로 한 보수 세력과 옐친 진영 간의 마지막 일전의 성격을 띄었다. 이번 사태 초기부터 옐친에게 전폭적 지지를 보냈던 서방 국가들은 옐친이 승이함에 따라, 자칫 그가 실각할 경우 신냉전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옐친은 이번 사태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12월 총선과 내년 6월을 대선, 나아가 신헌법 제정 및 연방조약 체결 등 정국 운영에 주도권을 잡을수 있게 됐다.

이번 사태는 기본적으로 보.혁 간의 극한 대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옐친의 비민주적 정국 운영 방식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리스트≫의 지적대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정국에 대처해온 것이다. 부수파의 거두로 지목된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이나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위 오른쪽 사진 가운데)은 개혁의 속도와 폭에 이의를 제기했지 개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옐친은 이들을 좀더 설득해 개혁의 울타리 안에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로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다.이들과 함께 대다수 보수파 의원들도 정치적 퇴직이 불가피하다. 헌법상 95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이들은 올 12월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든가 자진해 의원직을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다. 현행 러시아 헌법은 옛 소련의 유산이다. 헌법을 수정할 권한은 의회에만 있다. 바로 이 점을 악용해 의회는 지난해 수백 번에 걸쳐 옐친 정부의 개혁 노선에 제동을 걸었다. 옐친이 강력한 대통령제와 서유럽식 양원제 도입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기초한 지는 오래이나, 현행 헌법에 대해 자구 수정마저 반대한 보수파 의원들의 저항에 부딪혀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이 옐친으로 하여금 의회 해산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게 한 것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옐친은 골수 보수파들을 제압함으로써 적어도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승리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89개 지방 및 자치 공화국 대표들의 태도에 따라 옐친의 향후 정국 주도 계획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12월로 예정된 의회 선거는 지역 대표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제대로 치를 수 없다. 옐친은 지난 4월 국민투표에서 66개 지역이 자기에게 지지표를 던진 사실을 들어 이들의 변함없는 지지를 믿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공산주의자가 대부분인 이들은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대폭 제한할 것이 뻔한 보수파보다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옐친이 낫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최근 들어 변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지난 9월30일 60개 지역 대표들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가진 뒤 옐친에 대해 의회측이 요구한'의회 및 대통령 선거 동시 실시'안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2월 총선 결과 개혁 성향의 새 얼굴들이 대거 정치 무대에 진출할 경우 옐친의 개혁 속도는 한층 빨라지리라 예상된다. 우선 그는 경제 수술을 위한 대대적인 조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달 평균 3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감축 재정을 통해 줄이겠다는 생각이다. 또 민영화와 중소 기업 촉진책을 대폭 도입할 계획이다.

이번 사태 때 대다수 모스크바 시민들은 시위대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민들의 태도가 반드시 옐친을 지지하는 것이었다고 봐야 하는지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러시아 국민 중 적어도 30%는 심각한 물가고와 극심한 경제난을 초래한 옐친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옐친은 이들을 포함한 말없는 다수 국민을 상대로 12월 선거에서 개혁파 후보들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해야 할 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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