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앞세운 옐친 ‘신독재’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10.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혈사태 후속, 수구파 싹쓸이 주력…12월 총선, 헌정회복 갈림길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형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자기의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비상 통치를 선언하고, 그 개혁 노선에 따르지 않는다고 의회 해산령을 내린 옐친. 최근 극적으로 막을 내린 보 ·혁 간의 유혈 충돌 과정에서 의사당이 포탄 공격으로 불타는 것을 본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 던지게 된 질문이다. 이제 골수 보수 세력을 제거한 상황에서 옐친의 초헌법적 통치는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러시아 사태가 수습 국면에 접어들면서 적지 않은 사람이 개혁을 앞세운 옐친 대통령의 신독재를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다. 미국 영국 등 주요 서방국들도 의회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개혁 독재’의 길로 나선 옐친 대통령을 마지못해 지지하면서도 마뜩찮은 눈초리를 보내는 듯한 표정이다. 오히려 서방 지도자들의 맹목적인 지지가 옐친의 독재 성향을 부추겼다는 시각도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브라이언 비드햄씨가 최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기고한 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다른 서방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이 지경까지 끌고온 장본인이 자신들이 아닌지 자문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1인 독재 가능성에 서방도 우려
10월4일 러시아 의사당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할 때까지도 옐친이 취한 ‘비민주적’ 수단은 개혁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시각이 강했다. 서방 세계의 눈에 소모전 양상으로 비쳐온 보 ·혁 대결은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않으면 안됐고, 그런 과정에서 이왕이면 옐친이 승리하기를 바라온 게 국제 여론이었다. 그러나 ‘10 ·4 유혈 사태’ 이후 국제 여론은 옐친에게 민주 헌정질서와 도덕성 회복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짐 호글런드씨는 “단기적으로 보면 옐친의 의사당 공격 명령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지난 91년 불발 쿠데타 때 보여주었던 도덕적 권위를 어떻게 회복할지가 앞으로의 과제다”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의 신봉자’라는 옐친이 민주주의의 보루인 의사당을 파괴한 만큼 무엇보다 급한 일이 도덕성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0 ·4 유혈 사태 이후 옐친이 취한 일련의 후속 조처들은 바로 이같은 정치적 도덕성 회복보다는 보수파 ‘완전 제거’에 초점에 맞춘 듯한 인상을 풍긴다. 오는 12월 의회 선거와 함께 지방 의회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나, 조르긴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해 그간 보수 세력에 동조해온 일단의 재판관들을 퇴진시킨 것이 단적인 예다. 이에 앞서 그는 사태 수습 직후 <프라우다>를 비롯한 친공산계 신문들을 정간시킨 바 있다. 이같은 조처들은 사태 수습 차원에서 예견된 것이긴 했으나 옐친의 급진성을 반영하듯 너무 급작스럽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번 유혈 사태와 관련해 군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조정하느냐 하는 것도 옐친에겐 큰 과제다. 사태 해결을 위해 군을 끌어들임으로써 군이 정치 사태에 개입하는 길을 크게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은 역사적으로 국내 정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해 왔으나 이같은 전통은 지난 91년 불발 쿠데타 당시 깨졌다. 따라서 옐친에게 군은 든든한 버팀목인 동시에 부담스런 존재이기도 하다.

옐친이 본격적인 개혁 독재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첫 관문은 올 12월에 치를 의회 선거다. 이 선거에서 개혁파 인사들을 대거 의회로 끌어들여 자기가 이미 내놓은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옐친은 이미 오래전에 대통령제와 서구식 양원제 도입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수구파 의원들은 자기네의 정치적 퇴진을 몰고 올 게 뻔한 헌법 개정안에 대해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헌법상 95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이들은 절대 개정 헌법안을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행 러시아 헌법은 옛 소련 시대에 만든 것이다. 헌법상 최고 권력 기관이 공산당이었기 때문에 입법 ·행정 ·사법 기능 구분은 별 의미가 없었다. 헌법에 대한 자구 수정 권한도 오로지 의회에만 있다. 바로 이같은 특권을 악용해 수구파 의원들은 지난해에만도 수백번이나 헌법의 자구를 수정하며 옐친의 개혁 작업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새 헌법안, 대통령에 권력 집중
현행 헌법이 자신의 개혁 조선에 본질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인식해온 옐친은 마침내 지난 7월 개혁파 인사로 구성한 제헌회의 전체회의를 소집해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새헌법 개정안(도표 참조)의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의 권한이 전례없이 강화됐다는 점이다. 개정안은 △현재의 인민대표회의를 폐지하고 연방의회(상원)와 두마(하원)를 신설하며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최고회의가 관할하는 연방중앙은행을 독립시키되 은행장에 대한 지명권은 대통령이 보유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밖에도 대통령은 비상사태 선포권과 국민투표 실시권을 갖는다(현행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민투표 실시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또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즉시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그밖에도 의회에서 헌법 재판소 재판관을 선출하게 한 현행 헌법과 달리 개정안에서는 대통령이 재판관을 지명해 의회의 인준을 받도록 했다.

이처럼 개정 헌법안은 사실상 대통령 한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다.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탄핵 절차의 경우 개정 헌법에서는 두마(하원)에서 탄핵안을 발의해 연방의회(상원)에서 결정하도록 돼있다. 즉 탄핵 발의와 결정이 이원화돼 있어 대통령에 대한 견제 장치가 그만큼 허술하다.

옐친은 개정 헌법을 통해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야만 현재 추진중인 여러가지 개혁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 본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개혁에 따른 전통을 회피하거나 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신이다. 70년 간의 공산 통치에서 벗어나 막 시험기에 들어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독재 소리를 듣더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상 통치령, 의회 해산령, 민영화 포고령 등등 집권후 지금까지 숱하게 나온 포고령은 개발 독재라는 ‘목적’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옐친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12월로 예정된 총선거와 지방 의회 선거를 자기 구도대로 진행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특히 89개 지역 및 자치 공화국에서의 선거를 제대로 실시할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는 옐친의 정국 장악, 나아가 러시아 연방의 장래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 지역 대표들은 대부분 보수계 인사들이며, 지방 의회 의원들도 과거 공산당에 몸 담았던 지역 유지들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옐친의 급진 개혁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어 왔고, 이번 모스크바 유혈 사태 때에도 상징적으로는 보수 세력을 지지했었다. 각 지역 대표들은 특히 천연자원개발권과 조세권에 대한 폭넓은 권한이양을 중앙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중앙 정부로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양보할 수 없는 처지다. 특히 지금까지 지방 정부로부터 거둬들인 막대한 세금원이 줄거나 끊길 경우 가뜩이나 재정난에 허덕여온 중앙 정부의 재정은 파탄 일보 전까지 갈 수 있다. 한 예로 지난해 중앙 정부의 총수입 중 44%를 지방 정부의 납부금이 차지했다.

보수파 득세하며 연방도 붕괴
12월 총선과 지방 의회 선가가 제대로 실시될 경우 러시아는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에 따른 제도를 갖게 된다. 러시아 국민은 옛 소련이 해체된 뒤 서구식의 의회 선거를 치러본 일이 없다. 또 역사적으로도 선거에 의한 대의 정부를 가져본 일도 없다. 따라서 의회 선거가 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

러시아에는 수백개의 정당이 있지만 50만명 넘게 당원을 확보한 정당은 새롭게 정비한 공산당뿐이다. 대부분의 정당은 당원이 많아야 수천명이다.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정당으로는 보수파인 세르게이 바부린이 이끄는 러시아동맹당, 민주러시아당, 개혁파인 가이다르 총리가 이끄는 러시아 선택당 등이다. 이 가운데 러시아동맹당과 공산당은 12월 선거 때 서로 연대해 개혁파정당에 맞설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의 기수라고 자임하는 러시아 선택당은 사유 재산과 개인의 기본권, 가족의 가치 등을 주요 강령으로 내세워 선거에 나설 방침이다.

앞으로 선거일까지는 약 10주밖에 안 남았으나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먼저 평화롭게 선거를 치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선거 운동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선거전이 시작되면 보 ·혁간 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중앙의 감시가 소홀한 지방 투 ·개표 과정에 부정이 개입할 소지는 충분하다. 더욱이 러시아 국민들은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직접 투표 형식으로 뽑기 때문에 선거에 대한 충분한 계몽 활동이 시급하다.

현재 러시아 정부는 새로 구성할 두마의 정족수조차 결정하지 않았다. 또 새로 도입할 비례대표제에 따른 의석 비율도 전혀 결정한바 없다. 가장 핵심 사안인 선거구 확정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부실한 선거 준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선거가 공정하고 평화롭게 치러질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옐친은 선거 준비가 설령 미비하더라도 선거를 강행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이다. 우선 선거를 치러 새 의회를 구성해야 신헌법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옐친은 정국을 안정시킨 뒤 내년 6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승리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옐친은 12월에 선거를 반드시 치르겠다고 공언했지만 선거에 불리한 상황이 지속돼도 선거를 강행할지는 알 수 없다. 보수 세력은 최근 폴란드 총선에서 옛 공산당 계열 정당들이 개혁 정당을 제치고 높은 득표를 한 사실에 크게 고무돼 있다. 이들은 현재 매달 30%씩 물가가 올라가고 금년에 들어서만도 돈가치가 50% 이상 떨어진 상황이 선거일까지 호전되지 않으면 유권자들의 반발 심리가 작용해 의의로 보수파 후보들이 개혁파 후보들을 제치고 대거 당선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본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보수계 인사들이 원내 안정 다수의석을 차지한 경우 옐친은 정국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 러시아 연방 해체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한다.

만일 옐친이 선거를 연기할 경우 독재적 정국 운영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스크바 유혈 사태의 원인 중 하나가 옐친의 비민주적 정국 운영이었음에 비추어 볼때 이같은 독단적인 정치 행태는 보수 세력뿐 아니라 개혁 세력의 저항도 불러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12월 총선과 지방 의회 선거, 나아가 내년 6월의 대통령 선거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일정이 옐친의 뜻대로 착착 진행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현재와 같이 옐친이 일방적 개혁 독재를 편다면 말없는 다수 국민에게 상당한 정치적 소외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