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을 美學의 눈으로 본다
  • 김상익 차장대우 ()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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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한 노벨 화학상 수상자 호프만 박사 “분자는 아름답다” 미적 개념 정리



미국 코넬 대학의 로알드 호프만 박사는 3년전 아내와 함께 오하이오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외도’를 결심했다. 8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호프만 교수는 연구에 미친 과학자가 늘상 그러하듯 비행기에 타자마자 쓰고 있던 원고뭉치를 꺼내 들었다. 아내는 여행하는 기분이 잡친 듯 “도대체 무슨 원고냐” 하고 물었다. 호프만 박사는 ‘아름다운’ 분자에 관한 논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무엇 때문에 당신 눈에 분자가 아름답게 보이느냐”고 아내가 되받았다. 호프만 박사는 장시간 동안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아내에게 설명했다. 그날의 대화가 뒷날 ‘응용이론화학’을 전공하는 호프만 박사로 하여금 전공과는 동떨어진 미학 논문을 쓰게끔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물질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자가 감성의 영역인 미학에 관심을 갖고 논문을 쓴다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호프만 교수의 미학 논문은 미학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아 미국에서 발행되는 계간지 《미학과 예술비평》여름호에 게재되었다. 지난 10월6일 서울대학교가 주최하는 서남초청강좌(동양그룹 후원)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호프만 박사의 강연회 주제도 ‘분자의 아름다움’이었다.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이 저술과 강연을 통해 대중적 성공을 거둔 데 비해, 화학자들은 물리학자보다 더 보수적이어서 화학의 대중화를 시도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호프만 박사는 화학계의 괴짜라고 불릴 만하다.

3년전 호프만 교수의 아내가 비행기 안에서 의문을 품었듯이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가 아름답다는 주장은 무척 생소하다. 그러나 일반인의 생각이 어떠하든, 인간의 생존에 필수인 산소에서부터 공해를 유발하는 아황산가스와 일산화탄소, 미스 유니버스와 노트르담의 꼽추가 서로 다를 바 없이 공유하는 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자는 아름답다’는 것이 화학자들의 생각이다. 이덕환 교수(서강대 ·화학과)는 “고작 1백개 안팎의 원소를 원료로 하여 수십만개의 분자를 만들어내는 화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수도 없이 아름답다는 말을 되풀이하지만, 논문과 같은 공식적인 발언을 통해 ‘아름답다’는 말을 사용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호프만 박사는 ‘분자가 아름답다’는 말을 최초로 공식화하고 나름대로 이론적 체계를 세운 희귀한 화학자인 셈이다.

“과학자와 예술가에겐 모두 장인정신 필요”
그렇다면 화학자들의 눈에 분자는 어디가 어떻게 아름답게 비치는 것일까. 호프만 박사는 먼저 분자의 형태에 주목한다. 분자의 형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하나 둘씩 알려졌지만, 일부 분자는 대칭 또는 비대칭의 견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간단한 예로 물분자의 경우 산소 원자가 두개의 수소 원자를 대칭 형태로 거느리고 있으며, 고등학교 유기화학 시간에 배웠듯이 벤젠 분자는 벌집 모양 육면체를 이루고 있다.

호프만 박사는 “어떤 분자는 완벽한 대칭성을 지니고 있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며, 원자들 사이의 미묘한 상호 작용 때문에 생기는 비대칭적 성질 때문에 생기는 비대칭적 성질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 되기도 한다”며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NaNb3O6 분자의 예를 든다(그림1 ·2 참조). 이 분자는 나트륨(Na) 1개, 니오브(Nb) 3개, 산소(O) 6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는 그림에서 보듯 조형적(대칭적) 아름다움을 3차원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원소들의 결합력에 따른 비대칭성도 아울러 갖고 있다는 것이 호프만 박사의 분석이다.

호프만 박사는 분자 구조의 형식미가 칸트의 미학 이론에 잘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칸트는 ‘무목적적인 주관적 합목적성의 형식’이라는 말을 통해 목적을 배제한 형식의 아름다움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프만 박사는 분자의 아름다움에서 목적, 즉 유용성(utility)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림 3에서 아래의 분자 구조를 보면 CH2가 두개의 고리가 엮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위의 분자 구조는 어수선하고 산만하다.

그러나 CH2가 고리 형태를 갖추게 되려면 이같은 중간 형태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호프만 교수는 이 분자가 변형 고리 속한 단계의 것으로서 어떤 목표(고리형태)에 도달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분자라고 규정한다.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한다면, 이 분자는 아름다운 집을 짓기 전 단계의 어수선한 공사장 모습니다. 일반인들은 공사장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건축가는 벽돌이 한장씩 쌓여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호프만 박사는 말한다. 따라서 목적성을 지닌 이 분자는 칸트에게는 아름답지 않을지 몰라도 화학자에게는 아름답다고 그는 주장한다.

호프만 교수에 따르면 복잡성은 분자가 아름다운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 몸 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은 많은 원자가 모여 이루어진 고분자로서, 형태 또한 매우 복잡하다(그림4). 마치 여러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킨 모양을 하고 있는 헤모글로빈분자는 징그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호프만 교수는 “어느 분자가 이렇게 변형될 수도 있고 저렇게 변형될 수도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목적에 맞게 진화하는 분자의 복잡성과 풍요성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이 호프만 교수의 미의식이다.

호프만 박사는 분자 구조의 아름다운을 형식성 ·유용성 ·전형성 ·복잡성 ·새로움 등 다섯 가지 개념으로 정리한다. 그는 미학 논문을 쓰기 위해 오십이 넘은 나이에 칸트의 이론부터 새로 공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미학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 호프만 박사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비전문가인 화학자가 내놓은 미학이 하나의 이론으로서 공인받고 있느냐’는 질문에 직접 답변하지 않고 “아름다움 이라는 것은 2천5백년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야기되어 왔으며, 아직 그 개념이 합의된 바 없다”라고 둘러 말했다. 그는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처럼, 좋은 운동 경기를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화학에서의 미학 이론을 미학자들이 흥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호프만 박사는 과학과 예술은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며, 과학자와 예술가에겐 모두 장인 정신이 필요하다면서 과학과 예술의 공통점을 들었다. 호프만 박사는 “많은 분자로 이루어진 인간은 공기에서부터 공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화합물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과학, 특히 화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도 화학의 대중화를 위해 글을 쑤고 강연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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