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 서평
  • 양성철 (경희대교수 · 국제정치)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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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지성의 마무리 작품

《새로운 현실》 피터 드러커 지음 金龍國 옮김 시사영어사 펴냄
 피터 드러커의 《새로운 현실》이란 최근 저서는 그가 80평생 연구 · 출판해온 경영, 경제, 정치, 사회문제 그리고 심지어 소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과사전적이고 광범위한 학문적 영역과 지식을 집약한 20세기 지성의 마무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20세기를 꼭 10년 남겨둔 오늘 21세기를 맞이하는 새 현실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그의 특유의 혜안과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풀어 정리하고 있다. 그가 크게 강조하는 것은 21세기를 곧 맞이하는 세상은 벌써 많이 바뀌었는데 이를 이해하는 우리의 개념과 사고방식은 아직도 19세기, 20세기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을 출간한 1776년(미국독립선언의 해이기도 하다)부터 별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873년 비엔나에서 증권시장 마비사건이 발생하던 해까지를 이른바 자유방임주의가 사고와 행동의 기본틀을 주름잡던 시기라고 규정한다. 또 1973년에 일어난 오일쇼크는 그때까지 정부가 진보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나아가서는 정부를 포함한 ‘문제의 해결사로서의 사회’라고 하는 진보주의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사회주의, 진보주의, 공산주의는 끝났다
 거시적으로 보면 지금의 세계는 거의 1백년(1776~1873)을 주름잡았던 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그다음 1백년(1873~1973)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진보주의, 공산주의가 끝나고 이제는 새 다원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작한 경제이익을 기반으로 한 통합정책이나 그와 같은 맥락의 민주당 정권의 정책이나 정강들,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민주당 대통령 후보 먼데일, 두카키스의 프로그램 등은 이젠 시대 착오적인 착상이란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식민제국인 ‘소련제국’도 끝장이 났다고 드러커는 진단한다. ‘소련제국’에 대한 그의 전망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유럽소련과 아시아소련 두쪽으로 갈라지는 것으로 유럽쪽, 특히 발틱연안 공화국들은 보다 더 자치적이고 독립적 위치를 굳혀가고 유럽의 일부로 통합돼가는가 하면 아시아공화국들은 중국에 더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나가는 길이다. 두번째 길은 아시아인이 유럽권을 압도 · 지배하는 방향으로의 진전이다. 셋째로는 ‘소련제국’이 서로 불안 · 다툼을 거듭하면서 연방이라는 큰 테두리를 견지하는 길이라고 내다본다. 그러나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길을 걷게 되든 ‘소련제국의 앞날은 ’소련‘도 ’제국‘도 아닌 새로운 모습일 것이라고 드러커는 내다보고 있다.

 그는 또 군사무기의 비생산성 失效性, 정부 역할의 상대적 축소화, 공공기업의 私營化를 강조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새로운 현실’은 다원화사회, 다원화정치로 집약된다. 다원화사회는 기능과 실적을 기준으로 한다. 다원화사회는 富를 창출 · 축적하거나, 건강관리를 집중적으로 취급한다거나, 청소년의 가치와 습관을 육성한다거나 하는 오직 하나의 사회적 과제를 달성하려는 단일목적 조직의 다원주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다원화사회는 비정치적이다. 그러나 신다원화정체는 권력을 기준으로 단일목적, 단일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소수의 잘 훈련된 대중운동 다원주의다. 이들 소수집단은 숫자로 또는 설득을 통해서 이룰 수 없는 그들의 목적을 권력(힘)으로 달성하려는 일종의 ‘소수독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수독재 단일목적 추구집단은 전체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본다. 전자는 권력의 장악에는 관심이 없고 도덕만을 강조한다. 전자가 기생적 존재라면 후자는 포식적 존재다.

‘새로운 현실’은 다원적 사회 · 정치 지향
 아무튼 이 신다원주의사회, 신다원주의정체 안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자’ (생산공장의 ‘노동자’)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고(선진 비공산국가에서는 노동인구의 1/6정도) 고용주 또는 사용자의 고용인이 아닌 조직의 고용인이 대종을 이루게 된다고 드러커는 주장한다.

 전통적인 개념으로서 ‘노동자’ ‘농민’ ‘지주’ ‘고용주’등은 이젠 새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개념이라고 드러커는 역설한다. 후기실업사회에서는 지식노동자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후기실업사회의 지식노동자들에게 알맞은 지도자는 적을 밖에서 찾는 카리스마적 지배자가 아니고 우리 안에서 찾는 운영자 즉 공해, 환경오염, 환경파괴, 기후 등 우리 삶의 안에서 ‘적’을 찾고 해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보다는 콜, 루즈벨트보다는 트루만型이 새로운 현실에 걸맞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드러커는 또 군사시대가 아닌 통상시대인 오늘날은 과거에 통상이 영국식 보완적통상(Complementary Trade)기에서 미국과 독일식 경쟁적통상(Competitice Trade)기를 거쳐, 일본식 대결적통상(Adversary Trade)기를 넘어 이제는 상호호혜적통상(Reciprocity)기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또 빈곤의 극복이나 불평등의 해소는 경제발전의 마지막 手順이지 결코 경제발전의 첫 수순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특히 현재 선진 비공산권국가에서는 농민이 전체 취업인구의 3~5%로 극히 격감한 것처럼 서기 2010년이면 현재의 공장 노동자가 취업인구의 5~10%선으로 줄어들어 오늘날의 농민 숫자 정도로 격감된다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19세기, 20세기의 낡은 개념들인 ‘노동자’ ‘농민‘을 마치 사회구성체의 중요한 개념이요 현실인 것처럼 계속 외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한 조직에 근로자로서 그의 기술과 지식을 기여하는 후기실업사회의 조직인간이요 ’지식근로자‘가 새로운 인간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군사시대 아닌 상호호혜적 통상기
 경제학자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숲속에서 나무와 나무를 가리기보다는 산을 멀리서 보며 삼각형을 그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큰 눈으로 큰 형상을 그리다 보면 구체성과 섬세성이 결여되기 쉽지만 그 나름대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군데군데 넣어 비교적 형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고용주는 착취의 상징이고 노동자는 착취의 희생양이라는 낡은 개념의 노예가 되어 갈등과 파괴의 노사분규의 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도 큰 경고와 경각심을 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3백면이 채 못되는 책이지만 중요한 현실문제들이 꽤 상세히 그리고 촘촘히 다루어지고 있는데 지면관계상 소홀히 취급되거나 그 편린만을 소개하는 꼴이 돼서 서평자로서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서평은 원서에 의거했음을 밝힙니다.
<The New Realities : In Government and Politics / In Economics and Business / In Society and World View>. Peter F, Drucker. Harper & Row.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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