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와의 대화, 왜 하나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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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무마용 모임…자격 의심스런‘ 어른??도

  ‘시린 이빨을 감싸주는 입술'구실을 해줄 만한 원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잇단 분신과 전국적인 시위로 정국이 혼미를 거듭했던 5월17일과 18일, 盧泰愚 대통령이 연쇄적으로 '원로와의 대화'를 가진 후 이런 '바람'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자리에 초청된 사회 각계 원로와 야당총재 출신 인사들이 노대통령에게 국민정서를 재대로 대변했느냐에 대한 반응은 구구했다. 그러나 "잘했다"보다는 "그런 소리밖에 못하느냐"라는 불만이 많다. 특히 사회 각계 원로와의 회동에서 내각사퇴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야당총재 출신 인사와의 만남에서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시국의 화급성을 잊은 듯 한가롭게 내각제 개헌을 부추겼다는 사실 등은 시국.민심수습을 위한 자리와는 걸맞지 않았다는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다.

  원론과의 만남은 그 자체부터 왜곡돼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韓相範(동국대.법학) 교수는 "정당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현재의 집권체제도 정당정치의틀 안에서 여론을 수렴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원로와의 대화'란 편법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劉載天(서강대.신문방송학) 교수도 "청와대 모임 자체가 일종의 여론 무마용 내지 형식적 모임으로, 일종의 ‘대중 조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의회민주주의는 내각제 정부하에서든 대통령중심제하에서든 국민의 대표기관을 국회로 삼는다. 국회를 구성하는 의원은 국민의 직선에 의해 획득한 대의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국회를 뒷전으로 팽개친 후 국민적 신망이나 국민 정서의 대변이라는 점에서 ??자격논란'을 빚을 수 있는 인물들을 대통령이 불러들여 여론을 수렴한다는 것은 의회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행태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거대여당내의 다양한 의견조차 ??분열'이나 대통령의 통치권 침해로 몰아세우는 청와대 시각은 "국회를 부정하는 행동"이라는 비판을 부르기도 한다.

난대 없이 등장한 내각제 개헌론
  그런 탓에 야당은 원로와의 만남이 처음부터 정략적 발상에서 출발된 것이라고 의심한다. 신민당 ㅇ 의원은 "옛 야당 인사들을 초청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비서실이 내각제 개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위기 국면을 이른바 원로와의 대화란 형식을 통해 내각제 개헌 정국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18일 야당총재 출신 원로의 만남에서 내각제 개헌 문제가 엉뚱하게 등장한 것은 이민우 옛 신민당 총재의 발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내각제 개헌과 관련한 대화를 이만섭 전 국민당 총재의 메모와 기억을 바탕으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민우 : 수고가 많으십니다. 특히 야당했던 사람하고 같이 일을 하려니 얼마나 고심이 많으십니까.

  대통령 : 3당 합당을 한 것은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본질은 내각책임제입니다. 그 본질은 내각책임제입니다. 우리는 내각책임제 개헌에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각서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국민은 아직도 대통령직선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 동안만 덮어두자고 한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대통령선거 일년 전 쯤 되면 국민이 대통령직선제에서 오는 나라의 혼란을 걱정해 생각이 달라지고, 진정으로 걱정할 겁니다.

  이민우 : 동서(영호남)로 갈라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 형태를 바꾸는 문제를 검토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철승 : 두 김씨가 또다시 대통령선거를 치르려 하는데, 전쟁 같은 상황만 초래할 뿐입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을 밀실에서가 아니라 국민투표 등 공개적 절차를 통해 추진해야 합니다.

  이충환 : 내각책임제를 13대 국회에서 할지 14대 때 할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현실적으로 14대 때 민자당이 개헌선을 확보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만섭 : 나는 다른 원로분들과는 분명히 견해가 다릅니다. 제도의 장단점을 떠나 지금 국민들 사이에는 내각제 개헌을, 첫째 김씨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둘째 대통령께서 임기를 마치고 난 이후에 사후보장을 받기 위해서 강행하려 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3당 합당 때 합의서명했다면 그걸 비밀로 할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떳떳하게 발표했어야 옳은 것 아닙니까. 그걸 숨기다보니 지금 같은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만섭씨는 "좌중의 분위기가 내각제 개헌쪽으로 흐르는 것 같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냥 휩쓸려 나까지 개헌론자로 몰릴 것 같아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이날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옛 야권 인사들에게 내각제 개헌을 거론해달라고 청와대측이 사전에 주문했는지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민에게 불신감만 심어줬다"
  이런 까닭에 이번 원로와의 대화는 국민에게 불신감을 심어줬다는 비난도 있다. "5공 시절에 이른바 1중대.2중대.3중대로 불리면서‘들러리 야당'을 해서 국민적 신망이 없는 사람들이다"(신민당 ㅇ 의원) "오늘날 정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과거의 주역들을 부른다고 하기에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유재천 교수) "과연 무엇이 원로의 기준인지 그것부터가 석연치 않다 정부 당국의 입장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들만 부른 느낌이다"(한상범 교수) 등 이들 원로들에 대한 비판론이 쏟아져 나왔다.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인사들조차 자신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정책수립에 반영될 것인가에 대해 회

의적이다. 柳致松 옛 민한당 총재는 "시국수습책 모색을 위한 자리에 참석하긴 했지만 구체적 방법을 생각하면 참 막연했고, 이야기를 한들 얼마나 반영될 것이냐 하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른 한 참석자는 "청와대비서실장.정무수석.경호실장 등이 ‘근엄하게'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자유롭게 말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했고, 바른 소리를 하기는 심리적으로 참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만섭씨는 "우리들의 지적이 고려되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대통령의 스타일에 따라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5공 시절 全斗換 대통령의 경우 듣기보다 말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성격이 가부간에 분명하고 의사표시가 확실한 반면, 노대통령은 주로 듣는 입장이고 지나치게 신중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의사를 표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중간평가 실시 여부로 온통 시끄러웠던 88년 12월 당시 원론과의 대화에 참석했던 이씨는 "앞으로 3김씨를 보고 정치하지 마시고 국민을 보고 정치해주십시오. 국민에게 중간평가를 공약했으니 정정당당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니, 노대통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총재 말씀이 구구절절히 옳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이씨는 "청와대 만남이 있고 나서 대통령은 중간평가 실시를 위한 사전 준비를 지시했고, 선거자금까지 마련했었다. 그러다가 89년 3월10일 당시 평민당 金大中 총재를 만나고 나서는 마음이 변했다"고 말했다.

  한상범 교수는 "여론 반영의 통로가 자연스러우면 굳이 원로와의 대화라는 형식도 필요없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정치인들이 제자리를 찾았으면 오늘 같은 ‘총체적 난국'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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