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수씨 죽음, 미궁 헤맨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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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대책위 '타살'주장…'강제부검'결과 발표 않는 등 검찰 태도 석연찮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31)씨의 사인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눈덩이 처럼 불어나고 있다. 검찰이 지난 7일 강경대군 사건으로 백골단 해체여론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백골단을 동원해 영안실 벽을 뚫고 박씨의 시신을 강제로 가져가 일방적으로 부검을 실시한데다 박씨가 서울구치소에서 안양병원으로 이송된 경위, 병원에서 사망하기까지의 정황등을 수차례 번복 발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창수씨가 지난 2월 13일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조회의'에 참석했다가 구속되기 전부터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탈퇴 압력을 받아왔으며 사건 전날에도 안기부 요원이 3차례에 걸쳐 박씨와 전화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 밝혀져 사태는 점점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 한진중공업 노조와 안기부 사이의 '끈'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노조 사무국장 장세군씨가 10일 돌연 행방을 감추고 '고 박창수 위원장 사인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단장 권영길 언론노련 위원장)이 22일 "안기부 요원이 박씨가 숨지기 전날밤에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폭로해 박씨의 사망원인에 대해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국 뒤흔들 '큰 사건'으로 확대될 수도
  유족과 전노협 등 6개 단체로 구성된 대책위는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한진중공업 노조는 "박위원장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 이 정권이 박위원장이 죽은 진짜 이유에 대해 실토할 때까지 부산에서 가두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신민당도 21일 김말룡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 현장조사에 착수해 박창수 위원장 사건은 강경대군 사건에 이어 다시 한번 정국을 뒤흔들 '큰 사건'으로 확대될 조짐도 있다.     

  신민당 김말룡 단장은 "이 사건은 전노협과 한진중공업 노조에 대한 당국의 와해공작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실상을 밝혀내고 말겠다"고 말했다.

  10일 검찰은 2차 발표에서 "박씨가 4일 서울구치소에서 재소자 69명과 운동을 끝내고 감방으로 돌아가던 중 스스로 시멘트벽에 이마를 찧어 안양병원으로 이송됐으며 구치소 생활이 어렵고 노조활동에 회의를 느껴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박씨가 투신 직전인 6일 새벽 4시10분경 찾아온 신원을 알 수 없는 대학생 차림의 청년과 만난 뒤 초조해하다 링게르병을 들고 나가 투신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유족과 대책위측은 박씨의 죽음이 안기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거의 '단정'하고 있다. 유족과 동료 조합원들에 따르면 박씨는 5월 4일 안양병원으로 이송되기 얼마전부터 눈에 띄게 부인을 걱정했다고 한다. 특히 부인이 면회갔을 때는 "감방 안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는 말을 자주하면서 "부산에 있지 말고 성남 어머니 집에 가 있어라" "누가 나를 석방시켜준다고 해도 절대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그 인신매매범이 네 얼굴을 보여달라고 졸라대니 네 사진은 보내지 말고 애들 사진만 보내라"얘기를 했고, 부인에게 뭔가 적혀 있는 쪽지를 전해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입원하기 직전에는 면회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독방에 있고 싶다. 애 엄마에게 몸조심하라는 얘기를 꼭 전해 달라"는 얘기를 되풀이했다.

  대책위는 28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구치소 안에서 안기부의 공작이 끈질기고 집요하게 계속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진 중공업 노조 조직부장 한재문씨는 박씨가 수감중인 4월25일 부산 대연동 모 카페에서 정세군 사무국장 주선으로 안기부 직원을 만나 "전노협 탈퇴와 해고자 복직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최근 폭로한 바 있다.

  대책위측은 박씨가 사망하기 전날 안기부가 3차례에 걸쳐 병원에 전화를 해온 것 자체가 안기부가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씨와 장씨는 5일오후 7시쯤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로 안기부 직원과 통화를 했으며 이후 걸려온 2차례의 전화는 장씨가 받아 통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는 나중에 부인에게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전노협에서 탈퇴하면 석방되도록 힘써주겠다. 완전 탈퇴가 어려우면 형식상 탈퇴를 선언하고 내부적으로는 계속 전노협에 관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회유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유족들에 따르면 박씨는 표면적으로는 이마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어 병원에 이송돼 왔지만 몸이 여러 군데 상해 있었다고 한다. 특히 허리와 어깨가 몹시 불편한 것 같았다는데 어깨쪽을 만지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박씨는 또 가족들에게 "감방에 있을 때 여러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 동생·간호사 진술 엇갈려
  유족들은 박씨가 자살한 게 아니라 타살 됐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박씨의 이부동생 황인갑(23)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황씨는 형이 죽던 날 밤 1시가 조금 넘어 이정호 노조위원장 직무대행과 장세군 사무국장을 미리 잡아둔 여관으로 안내하러 갔다가 도중에 같이 술을 마시고 2시쯤 병원으로 돌아왔다. 황씨가 병실에 들어서니 형과 형수는 잠을 자고 있었고 간호사 홍문숙씨와 오의순씨는 앉아서  무슨 일인가 하고 있었다. 황씨는 형수가 떨면서 새우잠을 자고 있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덮어주고 병실 밖으로 나오다 보니 교도관 중 부장님 이라고 불리는 교도관은 졸고 있었다. 황씨는 가슴이 답답해 천천히 걸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어둠 속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 서서 담배 한 대를 피우는데 웬지 등골이 오싹했다. 황씨는 병실로 내려가 형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밖으로 나와 휴게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시계를 보니 3시30분이었다. '한시간만 자야지'하고 생각했다. 누군가 흔들어 깨워서 눈을 떠보니 간호사 홍문숙씨가 "형이 나간 지 45분이나 됐는데 들어오지 않아 걱정이 돼서 깨웠다"고 외치고 있었다. 잠시 후 황씨는 7층 옥상에서 교도관과 함께 병원 공터에 쓰러져 있는 형을 발견했다.

  죽어 있는 박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했다. 두 팔과 다리를 약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오른쪽 발에 유리 파편 같은 게 박혀 피가 조금 흐르고 있을 뿐 별다른 외상이 없어 7층에서 떨어졌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시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링케르병이 깨져 있었는데 파편들이 한군데 모여 있어 7층에서 떨어져 깨졌다고 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자살할 사람이 링게르병까지 들고 투신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황씨와 유족들은 박씨가 타살됐으며 병실을 나간 지 '45분'동안 무슨일을 당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간호사 홍문숙씨와 오의순씨의 증언은 달랐다. 홍문숙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두 간호사는 새벽 4시에 환자에 대한 정기처치를 하고 있었다. 홍문숙씨는 언제 들어 왔는지 모르지만 박씨의 동생 황인갑씨가 4시10분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환자에 대한 처치를 다 끝내고 카드 정리를 하고 있는데 4시40분쯤 박창수씨가 링게르병을 들고 일어섰다. 박씨는 옷매무새를 고친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12시에서 2시 사이에도 혼자서 화장실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저 또 화장실에 가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10분쯤 지났을까, 화장실에 충분히 다녀올 시간이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교도관에게 얘기하려고 막 일어서려는데 교도관 한명이 마침 들어왔다. 교도관이 환자는 어디 갔느냐고 물어 "화장실에 간 것 같은데 안오신다"고 했더니 교도관은 허둥지둥 박씨를 찾아나섰다. 교도관들이 박씨를 찾고 있는 동안 황씨를 흔들어 깨우며 "형님이 화장실 가셨는데 안 오신다"고 외쳤다. 홍문숙씨는 황씨가 4시 10분 이후에 잠든 것이 확실하며 황씨를 깨우면서 "형이 나간 지 45분이 지났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간호사들 얘기대로라면 박씨는 병실을 나간지 10분 안에 죽은 셈이다.

  박씨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또 있다. 교통사고를 당한 부인을 중환자실에서 간병하던 안종석(76)씨는 전날 집에서 폭 잤기 때문에 일찍 눈이 떠졌다. 시계는 보지 않았지만 4시가 넘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수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모두 잠들어 있었다. 그때 침대 윗부분을 일으켜 세워 비스듬히 누워 있던 박창수씨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음 다시 눕는 것이었다. 박씨는 비슷한 동작을 3번 반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안씨도 누워 있기가 답답해 박씨가 나간 뒤 '바로'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보니까 두사람(교도관)이 병실 문 이쪽 저쪽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휴게실에서 무심코 텔레비전을 들었으나 화면이 나오지 않아 다시 막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쿵"하는 소리가 난뒤 거의 함께 "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병실로 돌아와 잠시 있으려니까 한사람이 들어와 간호사에게 "저 환자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곧바로 또 한사람이 들어와 똑같은 말을 물었는데, 간호사는 "화장실에 간 것 같은데 안 온다"고 대답했다. 두사람은 밖으로 황급히 뛰어나갔는데 병실 밖 소파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 같았다.

  안씨의 증언은 간호사들이 얘기와 부분적으로 틀린 곳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일치하고 있다. 또 안씨의 증언으로 교도관들이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서 박씨가 자살을 하거나 타살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나 않았나 하는 의혹은 해소된 셈이다.

두 간호사 "괴청년 다녀간 적 없다"
  그러나 박씨 가족들은 여전히 박씨가 자살했다고 믿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특히 황씨는 자신은 분명히 3시30분에 잠들었고 간호사가 형이 나간 지 45분이 지났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검찰이 "20대 청년이 다녀간 뒤 박씨가 초조해하더니 밖으로 나가 투신했다"고 발표한 부분은 악의적인 날조가 분명한 만큼 '검찰측 증인'의 얘기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된 뒤 간호사들은 "4시10분께 괴청년이 다녀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으나 검찰은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사건 초기부터 검찰의 태도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보겠다는 의지가 애초부터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검찰은 시신을 맨 처음 목격한 박씨의 동생 황인갑씨의 진술도 듣지 않고 수사결과를 발표했으며 부검결과도 공개하지 않은 실정이다. 대책위측은 "일반적으로 변사체가 발견되면 현장을 보존하는 것이 원칙인데 검찰측은 서둘러 시신을 현장에서 옮겼으며 모 검사는 '이 사건은 검찰의 손을 떠났다'고 얘기하기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노협 홍보실장 이용범씨는 "검찰의 태도는 이번 사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안기부는 전노협을 와해시키기 위해 부산지역 노조총연합을 집요하게 공략해왔는데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박창수 위원장은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부산 지역 사업장에서 한진중공업 노조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특히 박창수씨는 지난해 7월28일 조합원 93%의 지지를 얻어 위원장이 된 후부터 부산 지역 노동운동계의 기둥역할을 해왔다. 한진중공업 노조조합원 김병철씨는 "박위원장은 '우리는  죽어도 전노협을 탈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잘못하면 부산노련이 무너지고 전노협 자체 조직이 위태롭게 되며 노동운동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고 얘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사인규명이 될 때가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벌써 20일이 넘도록 한뎃잠을 자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는 비단 노동문제뿐 아니라 안기부의 사찰, 제소자 인권, 검찰의 중립 등 한가지만 해결하기에도 버거운 문제들이 너무 많이 걸려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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