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의 정의, 90년대의 비전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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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따른 동구세계의 대폭발로 독재는 가고 자유에의 길이 열리고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차우셰스쿠정권이 무너짐으로써 89년 동구권을 휩쓴 자유화혁명은 분수령을 넘은 것 같다. 24년간 철권을 휘두른 동구권에서 가장 완고한 스탈린주의가 자유를 절규하는 민중의 거센 항거 속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혁명이 공산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유화 물결을 수용하면서 대담한 시장경제 메카니즘을 도입하여 인민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21세기에 이르는 마지막 10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공산주의는 이미 이데올로기로서는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동시에 빛깔이 어떻든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독재와 획일주의는 발붙일 땅을 잃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큰 흐름이요 인류의 큰 의지였다는 것이며, 20세기 마지막 10년은 ‘역사의 종언론’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프란시스 후꾸야마 주장대로 자유주의야말로 인류의 최종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는 연대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구사태에서 주목할 중대한 사실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을 신성시하는 수법만으로는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가령, 히틀러나 뭇솔리니나 또는 일본군국주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시도였으나 해학적으로 파시스트적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처럼 공산주의의 목적달성을 도와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히틀러가 안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의회민주주의를 분쇄하고 밖으로는 제2차대전을 도발함으로써 결국은 동독을 포함한 동구권의 공산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적색독재와 백색독재의 싸움에 무산대중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대의명분 앞에 자본가 부유층을 대변하는 백색독재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중국의 공산화에 발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전후 동서냉전구조 속에 공산주의 對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의 싸움에 오히려 공산주의가 평화의 주도권을 잡아 아시아 · 아프리카 신생국가들 젊은이들에게 매력적 존재로서 희망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유와 사회정의가 정치적 안정의 전제된다
 그러나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극복한 기본이념은 자유 · 정의 · 단결을 표방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의회민주주의, 시장경제원칙 위에 복지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이룩한 것, 이것이야말로 지난 45년간 서구사회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특히 막강한 서독의 자유체제 앞에 동독의 공산체제가 싱겁게 무너지고 있고, 그들이 쌓아올린 베를린장벽을 그들 스스로 무너뜨리게된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나는 몇해 전 서독의 부수상 겸 외상인 한스 겐셔를 만나 서독이 전후 절망적 어려움 속에서 아마도 가장 안정된 민주주의체계를 이룩한데 경의를 표했을 때 그가 나에게 들려준 말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히틀러 독재체제하에서 겪었던 그 무서운 경험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높혔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회적 정의가 분명히 정치적 안정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동서독체제간의 어떤 경쟁에 있어서든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 즉 최대의 자유를 국민에게 보장해주는 것만이 우리 체제가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임을 항상 믿고 있읍니다. 언제나 더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사람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해지는 것이죠??

 지금 우리에게는 동서독간의 평화적 체제경쟁과 흡사한 승패가 1990년대에 한반도에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고, 그것이 결코 허황한 꿈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국제정세는 뚜렷이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화해시대로 급진전하고있다는 것이 명백한 이상 언제까지나 한반도만이 냉전의 孤島로 역사발전의 뒷전에 밀려 쩔뚝거릴 수 없지 않은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을 교주로 삼는 북의 1인숭배체제가 무너져야만 뜻있는 남북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맞기는 맞되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만일 그런 주장이 전면적으로 맞다면 김일성이 죽거나 그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북한과의 대화나 교류는 일체 삼가야 한다는 냉전논리로 돌아가고 만다. 그보다 과연 우리가 서독처럼 자유가 보장되고 사회적 정의가 분명 정치적 안정의 전제가 되는 그러한 튼튼한 사회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답하여야 한다.

남한의 서독화로 북한의 동독화로 유도해야
 지난 9월 서울에서 실시된 어느 사회조사에 따르면“소득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81%가??불공평하다??라고 대답하였는가 하면 정부시책이??부유층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3%에 불과하였다. 지난 11월 서울시가 실시한 다른 조사에 따르면 74.3%가??일한 만큼 경제적 대가를 받지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고 84.4%가??우리 사회는 부자들만 잘 살게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고서야 안정된 사회, 평화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왜 정직하고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이 땅의 일부 젊은세대가 이미 동구에서 버림받고 빛이 바랜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있는 가를 절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자유를 누린다고 해도, 그 자유가 평등의 가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안정을 기대할 수 없고‘부익부 ?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을 맞음으로써 과격혁명세력에게 기름진 토양을 베푸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는 희망과 기대 속에 1990년대를 맞고 앞으로 10년이면 21세기에 들어선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정착시켜 남북접촉과 교류의 확대로 분단의 고통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평화적인 통일에의 가능성을 키워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여기서 거듭 주장하고 싶은 것은 막연히 북한의 동독화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남한의 서독화를 촉진하고, 그럼으로써만이 북한의 동독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결은 간단하다. 가진자들이, 돈과 권력과 지위를 가진자들이 大悟反省, 분배정의의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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