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답변서 어떻게 작성됐나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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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정보다 법률적 해석만 중시

“어느 시대 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게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를 마감하던 날 이뤄진 全斗煥씨 증언의 요체는 이 한구절에 집약돼 있다. 全씨측은 2시간 분량의 답변서를 준비하기는 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야말로 한낱 군더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6·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거의 일방적인 훈계조일수도 있는 ‘증언 아닌 증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당연하다.

全씨는 왜 87년 연희동을 떠날 때의 사과문과는 그 내용이나 억양에 있어서 판이한 답변을 했을까. 또한 全씨의 핵심참모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와 같은 답변서를 준비했을까.

全씨의 증언이 이뤄지기 직전 李亮雨변호사는 “全 전대통령의 직접 주재하에 백담사에서 나와 閔비서관, 安실장 등 3명이 답변서 작성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므로 이번 全씨의 증언은 사실상 이들의 공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에는 全씨 증언 하루 전에 백담사를 찾았던 張世東 전안기부장이나 許文道 전통일원장관의 주장도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가능하다.

閔正基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답변서에는 全 전대통령이 직접 구술한 부분도 있고 우리가 준비한 부분도 있다”고 말해 답변서의 내용에는 상당 부분 全씨의 심중이 그대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지난번 연희동을 떠나면서 사과했던 내용은 全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기 보다는 악화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일종의 미봉책이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 당시 청와대팀들은 “이것으로 5공문제는 마지막이다. 더 이상 야당측이 문제삼지 않게 하겠다. 全 전댕통령은 잠시 동안만 백담사에 있다 나올 수 있게 하겠다”는 언질을 주었고 이를 그대로 믿었던 全씨측에서는 계산된 시나리오에 의한 對국민 사과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적인 감정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 李炳注씨의 조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은 여러모로 일년전 당시의 상황과는 다르다. 청문회에서의 증언은 말 하나 하나가 법적 구속력에 저촉될 수 있는 공식적인 발언이 된다. 나중에 혹시라도 야권에서 사법적 차원의 제재조치를 요구하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대로 표현된 대목이다. 이에 따라 국민감정 보다는 법률적 해석만을 중시한 全씨 참모들의 입김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崔元榮변호사는 “구속요건으로서 주관적인 요건을 요구하는 범죄의 경우, 과거의 기억에 反하는 증언 대신 추상적인 증언만을 하면 대부분 공소 유지가 어렵다”면서 “全씨의 증언도 증언내용 만으로는 공소유지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全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죽음의 약사발이라도 달게 받겠다” “5공청산을 위해서라면 감옥에라도 가겠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국회증언과는 판이한 별도의 답변서를 발표한 것은 증언 이후 더욱 악화될 국민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고단수의 이중전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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