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각료의 직무 성적표
  • 이흥환·김방희·박성준·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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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력 있으나 공안통치 앞장ㆍ 우유부단” 출입기자단 평가

 6공화국 3년3개월 동안 무려 11차례의 크고 작은 개각과 보각이 이뤄져, 4명의 국무총리와 84명의 장관이 물러났다. 개각이 잦았던 탓인지 ‘그 인물이 그 인물’이었던 탓인지, 그들이 재임기간에 어떤 치적을 남겼는지는커녕 이름조차 기억해내기 어려운 장관들이 대부분이다.

 5월 정국의 막바지에 밀려난 盧在鳳 총리와 鄭永儀 재무·李種南 법무·李熺逸 동력자원·金正秀 보건사회 등 4부 장관은, 재임기간 동안 어떤 정책을 폈으며 그 정책으로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

 《시사저널》은 각 부처 장관의 행태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서 비판적이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집단을 출입기자라고 보고, 이들을 대상으로 노총리와 4부 장관의 평가를 들어본다.

노총리, 거침없는 발언이 퇴진 재촉
 노총리를 5개월 동안 지켜본 총리실 출입기자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려 했다. 시국을 접어둔다면 국가발전을 위해 애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법이 서툴렀다. 공안정국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도 있다.”

 ㄱ 기자는 노 전총리의 적극적인 추진력을 높이 평가하며 한 사례를 들려준다. “연초에 눈이 내려 서울시내가 온통 빙판이 됐을 때 일이다. 그 날 적설량은 3㎜였다. 공무원들은 적설량 5㎜ 이상일 때만 비상근무토록 돼있었다. 노총리는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출입기자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총리에 취임한 뒤 한동안 공무원 불신증 같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지시를 했으며, 지시대로 안됐을 때에는 안일무사로 질타했다고 한다. ㄴ기자는 “노 전총리가 거꾸로 당한 적도 있었다”며 사례 한 가지를 전한다. “노총리가 프랑스 등 선진국의 예를 자주 들먹이며 한국 관료들의 의식개혁을 역설하자, 총무처에서 외국 관료제의 장단점을 종합·분석해 노총리에게 브리핑했다. 그제서야 무언가 느끼는 듯했다.

 ㄷ기자는 노총리의 개혁의지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는 금융투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망했다는 얘기를 자주 했고, 재벌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시각이 조기 퇴진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ㄹ기자는 “노대통령으로부터 실권을 넘겨받아 행정부를 장악할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 감각이 모자랐다. 당정간에 갈등을 일으킨 점, 관훈클럽 토론회나 텔레비전 토론에 나가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내 발언수위를 조절하지 못한 것들이 그의 퇴진을 재촉했다”고 말한다. 노재봉 전총리와 절친한 사이였다는 전 언론인 ㅇ씨는 “총리는 교수처럼 시국상황을 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그는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재무
통화량 관리를 잘한 정영의 장관의 퇴임에는 극심한 자금난을 겪어야 했던 기업들의 불만과 로비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정영의 재무장관은 금융통화 정책의 지속적 추진이라는 차원에서 개각 직전까지 유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탓에 재무부 안팎에서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ㄱ기자는 “재무장관이라는 자리가 크게 욕을 먹지만 않으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라면서 “정장관이 금융계로부터는 크게 욕먹지 않은 장관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재무부를 출입하는 상당수 기자들은 “올 연초부터 극심한 자금난을 겪어야 했던 기업들이 그의 보수적인 통화관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정장관의 퇴임에도 이런 기업의 불만과 로비가 작용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통화정책은 긴축이냐 아니냐에 따라 기업의 이해가 극명하게 드러나, 기업의 입장에서 재무장관의 통화관리를 평가할 수 없다.

 ㄴ기자는 “국민경제 차원에서 보면, 정장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통화량의 적정관리를 위해 잘 버티었다. 신임 李龍萬 장관은 여러 선거들을 앞두고 있어서 돈을 더 풀 것 같다”고 내다본다. 이 기자는 정장관의 실책으로 여신관리제도 개편을 들면서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려 했다지만 재벌을 살찌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ㄷ기자는 “정장관은 올해 2월 시중은행장 인사를 하면서 5공 이후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李源祚씨의 영향력을 거부한 것이 그의 퇴임을 자초했을지 모른다”고 귀띔해 준다.

 최근 신임 이장관의 급진적인 금융개방정책이 전임 장관의 유작이냐, 아니면 이 신임장관의 첫 작품이냐 하는 엇갈린 추측이 나돌고 있다.

법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인 이종남 장관은 5공 핵심세력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으며 공안통치에 대한 여론의 화살도 피하지 못했다.

 이종남 법무장관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출신인 ‘수사통’ 장관이었다. 그는 역대 법무장관의 평균 임기인 1년을 간신히 넘겼으나, 공안통치에 대한 여론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자리를 내놓았다.

 ㄱ기자는 이장관의 재임 1년여를 되돌아보며, 그는 전임 장관들과는 몇 가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첫째 법무장관이 법을 집행해야 하는 자리이지만 인간으로써 꺼리게 마련인 사형집행 서명을 많이 한 장관으로 손꼽힐 정도이다. 역대장관들이 사형집행장의 서명 결재서류가 올라오면 온갖 핑계를 들이대며 미루다가 퇴임했던 점과 확실히 달랐다. 둘째 전기환 염보현 최열곤씨 등 5공 비리와 관련돼 구속되어 있던 정치성 사범을 과감하게 가석방함으로써 눈총을 받았다.”

 이에 대해 ㄴ기자는 “이장관이 5공화국 초기의 핵심세력과 절친한 ‘인연’과 6공내 5공 인물들의 입김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분석해준다.

 대부분의 법무부 출입기자는 그의 재임기간 중 쟁점으로 부각됐던 사안으로, 국가보안법 개정과 검찰총장의 임기제에 따라 빚어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간의 위상관계의 변화를 꼽는다. 국가보안법 개정시 불편한 심기를 보였던 데 대해 ㄷ기자는 “그가 특수수사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검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그가 공안파로 지목된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ㄹ기자는 “그는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민생치안의 확립과 전과자에게 새 삶을 열어주는 갱생보호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동자
걸프전 때 석유를 안정적으로 수급한 이희일 장관은 일관성을 갖고 에너지 정책의 기초를 다졌으나 자가용 10부제운행 폐지는 성급했다고 지적 받는다.

 동력자원부의 상당수 출입기자들은 “석유를 안정적으로 수급하여 걸프전 위기에 무난히 대처했던 것이 이희일 장관의 재임기간 중 가장 큰 공적”이라고 평가한다. 이 가운데 일부 기자는 “이장관이 정치적 판단에 휩쓸려 결정하기 쉬운 기름값·전력 요금의 인상이나 인하와 같은 에너지정책 결정에 나름대로 소신 있게 대처했다”고 꼽는다. 또 이장관이 나름대로 일관성을 갖고 에너지절약 정책을 꾸준히 강조하는 등 에너지 정책의 기초를 다졌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이장관 재임기간 동안 동자부 정책의 공과에 대한 질문에는 견해가 엇갈린다. 특히 해외자원 개발과 관련하여 ㄱ기자는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유전 개발에 투자하는 등 해외자원 개발을 적극 추진했다”고 말한다. 반면 ㄴ기자는 “전반적으로 보면 해외자원 개발에 오히려 소극적이었다”는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ㄷ기자는 “자가용 승용차 10부제 운행제의 폐지 조처는 성급한 결정이었다”고 밝힌다. ㄹ기자는 “공화계 전국구 의원이었던 이장관이 입각한 직후 의원직을 내놓는 바람에 이제는 실업자가 된 꼴”이라며 동정론을 편다. 이 기자는 이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쌓은 행정경험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인다.

 출입기자들은 “진념 신임장관이 우선 해야 할 일은, 국내 기름 유통시장 개방에 앞선 석유가격의 자율화 대책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또 올 여름철 전력수급난과 관련하여 “전력 수급안정책 마련이 시급하지만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여, 진장관에게 가장 당면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입을 모은다.

보사
‘정치장관’이라는 단점과 한계는 있었으나 김정수 장관은 부하 직원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어 ‘보사부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ㄱ기자는 “김정수 보사장관의 재임 1년2개월을 두고 보사부 직원들은 ‘태평성대’라 부른다”고 말한다. 이 기자는 “3선의 민주계 의원이지만 야당 출신 정치인답지 않게 행정 수완이 뛰어나 부하 관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고 평가한다.

 ㄴ기자는 그의 보사행정 수완을 “약사 출신으로 전문성을 갖고 있는 데다가 수년간 국회 보사위 소속으로 활동한 경험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의 여유 있는 행정력은 정책결정에 따르는 직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ㄷ기자는 “그러나 그는 ‘민주계 몫’으로 입각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어 미묘한 정책에 대해서는 ‘정치적 고려’를 거듭해 매듭을 짓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면도 없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 실례는 지역의료보험·생수시판의 법적 처리·식품검역에 대한 미국과의 통상마찰 등으로 모두 보사부의 고질적인 과제들이었다. 이 기자는 “그런데도 여권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고위관리들 사이에서 나올 법도 한 ‘무능하다’는 입방아질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무리없는 업무 스타일 덕분인 듯하다”고 설명한다.

 ㄹ기자는 이런 설명에 대한 반론을 편다. 그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핀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나치게 ‘주위’에 신경을 써 무리는 없었을지 모르나, 일을 박력 있게 추진하거나 찾아서 하지 않았다”며 정치장관이 갖기 쉬운 단점과 한계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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