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진압…끝없는 소모전
  • 김당.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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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투쟁 때 최루탄 10만발 발사, 피해자 속출…화염병 등에 의한 경찰부상 2천명

  지난 5월 넷째 주 내내 지속된, 검찰과 범국민대책회의 그리고 언론까지 합세한 분신자살자의 유서에 대한 필적 공방이 5월 마지막 주를 고비로 시들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시위 중 사망한 여대생의 주검을 둘러싼 사인 공방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검찰은 그동안 대책회의 관계자와 학생들의 문전박대를 겪으면서도 몇 차례나 명동성당과 백병원을 방문해 ‘인내하는 검찰’이라는 여론용 구색을 갖춘 만큼 6월 들어서는 그동안의 지상 공방전을 ‘실제 상황’으로 옮길 공산이 크다. 그러나 검찰이 대필자로 지목한 명동성당 안의 강기훈 씨와 압사로 추정하는 김귀정양의 주검을 강제로 구인해 그간의 지상 공방전을 마무리지으려 할 경우 또 다른 시국불안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검찰이 “공개된 장소에서의 조사라면 응하겠다”는 강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굳이 사전영장을 발부 받아 구속 수사하려는 것은 검찰권의 위신도 살리고 5월 투쟁에서 ‘6월 항쟁’으로의 징검다리 구실을 꾀하는 명동성당 농성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로써는 강씨의 대필 여부를 입증해 재야운동권의 도덕성을 실추시키기까지는 못하더라도 투쟁의 구심점인 명동성당 농성을 공략해 적어도 5월 투쟁이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음직하다. 이는 검찰이 유족과 대책회의에서 마다는 김양의 시신 부검을 굳이 고집하는 데에서 그 의도가 드러난다.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자면 유족은 부검을 반대하는데 검찰은 부검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대책회의에서는 “김양의 사망은 경찰의 무분별한 과잉진압이 빚은 필연적 결과”라면서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관련 책임자를 고발한 것도 아니고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굳이’ 부검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같은 검찰의 태도는 대책회의의 복잡한 속사정과 맞물려 있다. 우선 대책회의로서는 “딸을 두 번 죽일 수 없다”는 김양의 어머니 김종분씨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또 강경대군 폭행치사 때와는 달리 김양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결정적 순간을 증언해 줄 목격자가 없어 “부검을 하더라도 검찰이 사인을 뒤바꿀 수 없다”는 결정적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김기설씨 분신으로 “언론의 상업주의를 이용한 검찰의 의도적 필적 공방에 휘말렸다”는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는 대책회의로서는 또다시 쓸데없는 소모적 사인 공방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대책회의는 목격자 증언과 정황증거만으로 김양의 사인을 경찰의 과잉진압에 따른 최루탄 질식사로 굳히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대책회의에서는 “경찰이 먼저 과잉진압을 시인하고 그에 대한 수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검찰은 “먼저 부검을 실시한 다음 그 결과에 따라 경찰의 과잉진압 여부를 수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법의학자들은 대체로 직접 사인을 가리려면 부검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또 ‘김귀정양 폭행살인 진상조사단’ 단장인 양길승(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씨도 “부검이 직접 사인을 밝히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사고 당시의 정황이 정확히 밝혀질 때 부검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진상조사단은 우선 확인 가능한 당시 상황을 먼저 재구성한 뒤에 부검 여부에 대한 의견을 대책위원회에 제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루탄 남용에 비난여론 크게 일어
  이처럼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까닭은 검찰이 추정하는 ‘압사’일 경우와 대책회의가 주장하는 ‘과잉진압’ 또는 최루탄에 의한 ‘질식사’일 경우 각각의 사인이 갖는 의미와 책임 범위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은 김양 사망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국에 끼칠 영향이 크게 다르다는 정세판단도 공유하고 있다. 만일 경찰의 과잉진압에 따른 최루탄 질식사로 결말이 나면 최루탄 남용을 비롯한 공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부검의 칼자루는 검찰이 쥐고 있지만 진상조사단이 파악하고 있는 정황증거로 보자면 적어도 경찰은 불필요한 과잉진압을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우선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사복체포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시위대를 에워싸고 방패·곤봉 등으로 내리쳤고 최루탄을 난사해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증언은 본지 지난호(84호) ‘시사안테나’ 기사에 실린 사고현장의 사진으로도 뒷받침된다.

  진상조사단은 사고 현장에서 다량의 최루탄 파편과 최루탄 가루가 묻어 있는 시위대의 머리띠 신발 공책 안경 등을 입수해 놓고 있다. 특히 시위대의 것으로 보이는 찢어진 윗도리와 떨어져나간 구두뒤축 등은 경찰의 ‘급습’과 시위대의 ‘혼비백산’에서 빚어진 그날의 상황을 간접 증언하고 있다. 진상조사단은 또 대학신문 기자들이 현장에서 찍은 경찰의 과잉진압 장면 사진 5~6점도 확보해 놓고 있다.

  더욱이 경찰이 공개한 현장 진압부대(성북서 5개중대, 서울시경 4기동대 소속 5개중대, 송파서 5개 중대 등 15개중대)의 진압 일지에 따르면 5월25일 오후 5시부터 5시30분께까지 시위현장에서 다연발최루탄 5백76발, 사과탄 3백84발, KP탄 1천6백92발, SY-44탄 1백37발 등 2천7백여발을 집중 발사한 것으로 돼있다. 경찰은 그러나 김양 사망현장에서의 최루탄 발사는 부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상조사단은 지난 5월28일 김양의 사망현장에서 최루탄에 부상당한 시위 학생 2명의 증언을 공개, 사고현장 골목에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는 경찰의 주장을 반박했다. 사고현장에서 최루탄 화상을 입은 염구(21·충북대 과학교육 1)군은 이날 증언을 통해 “5월25일 시위도중 무랑루즈 옆골목에서 경찰에 포위 당한 뒤 1m 옆에서 터진 사과탄 가루를 뒤집어써 얼굴 목 가슴 어깨 팔 등에 혈점과 수포가 생기는 등 화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또 양길승씨는 당시 시위 현장에서 사과탄 파편이 오른쪽 어깨에 박혀 을지병원에 입원한 채수진(20·서강대 국문1)양의 엑스선 사진을 공개, 김양이 사고현장에서 최루탄에 질식사했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김양 사망 직후 결성된 ‘고 김귀정 열사 폭력살인 대책위원회’(위원장 권영길 언론노련위원장)는 “이번 사건의 핵심은 시위대에 의한 압사라거나 최루탄 가스에 의한 질식사라거나 하는 등의 협소한 사인규명에 있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사인이 최루탄 질식사로 판명되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무장한 경찰이 좁은 골목길 앞에서 비무장한 시위대를 포위한 채 구타하고 최루탄을 던지는 등 불필요한 과잉진압을 했다는 사실이 현재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김귀정양 사망을 부른 경찰의 과잉진압은 그래서 최루탄 남용을 막을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의 표적이 되고 있다.

 지난 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연세대 경영2)군의 직격 최루탄 사망으로 한때 최루탄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었지만 그 이후에도 최루탄에 의한 사망자가 4명이나 나왔다. 최루탄 피해 부상자는 가벼운 찰과상 파편부상 피부병 등 경상까지 포함하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눈에 파편이 박히고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터져야 부상자 축에 낄 정도이다. 전국에서 유일한 최루탄 피해 관련단체인 광주·전남 최루탄부상자협의회(최부협·사무국장 박창조)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한달동안 광주·전남지역에서 1백51명이 최루탄 부상으로 치료받은 것에 견주어 올해 비슷한 기간(강경대군 사망 직후인 4월 27일~5월29일)에 부상당해 병원치료를 받은 사람은 2백20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화염병보다 돌이 더 무섭다”
최부협이 조사한 광주·전남지역의 최근 주요 최루탄 피해 사례는 △4월22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위 중 최루탄을 맞고 실명한 최강일(전남대 토목 3군) △5월19일 수창국교 앞 육교 밑에서 최루탄 직격탄을 맞고 코뼈가 함몰한 이재현(전남대 농생물 1)군 △5월23일 목포에서 시위도중 직격 최루탄을 맞고 왼쪽 눈을 실명한 박동선(목포대 중문 2)군 △5월28일 전남대병원 앞 시위 중 직격 최루탄에 맞아 실명 위기에 처한 심재룡(조선대 전산과)군 등이다. 박창조씨는 그밖에 5월22일 조선대 정문 앞 시위 중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한 김길현(조선대 경영 2)군 등 “실명자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안경을 낀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충고하고 있다.

최근 치안본부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강경대군이 사망한 4월26일부터 강 군의 유해가 광주 망월동에 묻히기 직전인 5월19일 밤까지 24일 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된 시위·집회 때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은 10만1천4백9발(하루 평균 4천2백25발)로, 이는 90년 한 해 동안 사용한 25만여 발의 40%에 해당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같은 기간 중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은 9만9천3백여 개(하루 평균 4천1백37개꼴)로 90년 한 해 동안 투척된 38만1천8백여 개의 26%에 해당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집계대로라면 지난 한 달 동안 경찰과 시위대는 거의 1대 1 꼴로 최루탄과 화염병 공방전을 벌인 셈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견주어 화염병 사용량은 상대적으로 적은 폭으로 늘어났는데 최루탄 사용량은 큰 폭으로 늘어나 경찰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진압을 폈거나 시위 인원에 눌려 심리적으로 위축된 나머지 과잉방어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안본부는 같은 기간 중 총 시위 횟수 1천8백89건 중 화염병 시위 횟수는 3백71건(19.6%)으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일반경찰 3백70명과 전·의경 1천6백28명 등 모두 1천9백98명의 경찰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집계했다. 최근의 주요 집회·시위 날짜별로 보면 경찰이 시위대에 밀린 5월9일(민자당 해체투쟁) 가장 많은 4백 49명이 부상했으며 강군 1차 장례식이 거행된 5월14일에는 2백32명, 2차 장례식 및 국민대회가 열린 5월 18일에는 3백73명이 부상했다.

전경들은 웬만한 부상에는 약이나 바르고 때우는데 시위 중 부상자가 갈수록 늘어나 중상이 아니면 경찰병원에 입원하기 힘든 형편이다. 5월14일 서울 연희동 로터리에서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다리 골절상으로 12주 진단을 받고 경찰병원에 입원중인 김창현(22) 수경은 “처음에는 화염병이 가장 무서웠으나 지금은 피할 수가 있어 별로 무섭지 않다. 그러나 돌은 피하기가 힘들어 꼼짝없이 맞는 수밖에 없다”면서 “머리에 돌을 맞아 정신병동에 수용된 동료는 누가 책임질 것이냐”고 목청을 높였다. 5월24일 고려대 앞에서 얼굴 정면에 화염병을 맞았으나 다행히 동료가 재빠르게 소화용액을 뿌려 가벼운 화상을 입은 강용희 상경(성북서 제2기동대)은 “비가 오면 화염병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확 번져서 더 위험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치안본부가 비공식 집계한 80년대 10년 동안의 최루탄 사용량은 모두 1백87만여 발(하루 평균 5백11발)이었고 최루탄 구입에 쓴 예산은 3백51억4천여 만원(하루 평균 9백63만원 꼴)이었다. 최루탄 사용량의 연도별 추이를 보면 83년까지는 1만발에도 못 미쳤던 것이 84년 학원자율화 조처 이후 9만여 발로 급증했다. 대학가 시위가 확산된 85년 이후부터는 20만발을 넘어서 87년에 최고조에 달했다가 89년에 다시 16만3천8백여 발로 줄었으나 90년부터 다시 25만여 발로 늘었다. 최루탄을 가장 많이 쓴 해는 6월 항쟁과 이른바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휩쓴 87년으로, 10년간 사용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7만여 발을 발사해 1백24억원어치를 연기로 사라지게 했다.

시위진압 장비 안전성에 의심
 현재 경찰이 사용하는 시위 및 폭동 진압 장비는 KM-25탄(일명 사과탄), SY-44탄(총류탄), KP탄(총류탄), 다연발탄(일명 지랄탄) 등 최루탄 네 종류와 페퍼포그, 워터캐논(물대포) 등이다. 이중 SY-44탄(구리뇌관 사용)은 가격도 비싸고 발사 장치의 결함으로 사고가 잦아 경찰은 자체 개발한 신형 KP(Korean Police·고무뇌관 사용)탄으로 교체했으나 재고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남아 있다. 다만 SY-44탄의 경우 시위현장에서 발사장치를 쓰지 않고 사과탄처럼 손으로 던지는 투척사용을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치안본부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의뢰해 안전도 검사를 마친 KP탄의 경우도 앞서 말한 최강일 군의 실명사고에서 보듯 안전성을 의심받고 있다.

 경찰은 이같은 최루탄의 성분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용량 및 가격까지 ‘대외비’로 분류, 이를 공식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다만 90년 국정감사 때 제출된 자료 등에 따르면 최루탄의 종류별 단가는 사과탄 1만3천6백93원, SY-44탄 2만1천8백88원, KP탄 6천42원, 다연발탄 세트당 54만9천9백93원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화염병 1병을 제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1백30원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건 이처럼 값비싼 최루탄 직접비용과 그로 인한 피해비용마저 국민총생산(GNP)을 늘리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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