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맞서다 한풀 꺾인 재벌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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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책 기민하게 대응해 혜택 본 삼성에 시샘의 눈길

 “6공은 자기의 열렬한 지지자인 재벌을 작년 5월 이후 총체적 난국의 주범으로 지목하였고, 재벌에 대한 비난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고 생각하여 초법적인 조치를 강요했다.” 한국 정치경제학자의 간판격인 서울대 金秀行 교수의 진단이다. 재벌들에게도 똑같은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서울대 경영학과의 한 교수는 “6공은 다양한 이해를 가진 여러 세력들에게 질질 끌려왔다. 그러나 ‘재벌에 대해서만큼은 그럴 수 없다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고 재벌들은 믿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와 재벌의 관계가 미묘해진 가운데 최근 들어서 재벌로 대표되는 재계가 대정부 발언의 수위를 높이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다. 6공이 자신들을 볼모로 삼고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해온 재벌들이 드러내놓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3월 11일 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 劉彰順) 회장단 모임에서 정부가 업종전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적극 추진중이던 여신관리제도 개편안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명백히 표시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4월 중순에는 민자당의 세 최고위원을 초빙해 자신들의 불만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의 대정부 공세는 지난 5월7일에 있었던 경제5단체장의 정례회의에서 한 단계 더 높아졌다. 이 모임에서는 정부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는 수준을 넘어서 경제정책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정부가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주장을 적극적으로 자제시켜줄 것과 인력난 해소를 위해 재계와 공동으로 과감한 투자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부가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오염사건 이후 재계를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나치게 매도하고 있다며 중장기적인 환경정책을 제시하고 기업의 공해방지시설 건립에 금융보조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지나치게 정치적인 요소에 흔들리고 있다는 불만도 나왔다. 정부 당국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요구할 것은 당당히 요구하는 방향으로 경제단체의 역할을 조정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도 표명되었다.

“미래를 맡길 만한 정치 지도자가 없다”
 재계의 대정부 발언은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정부쪽에서 최근의 상황이 정부와 재계의 힘겨루기로 비쳐진 데 대해 재계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7일 유임된 대한상공회의소(경제5단체 가운데 하나)의 金相厦 회장은 고위층으로부터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 민자당 신민당 민주당 3당 대표와 만나겠다는 경제5단체장의 계획은 “만나서 뭘 하려는 거냐, 정말 만나려는 거냐”라는 통치권의 견제로 좌절됐다.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성토에 가장 앞장선 이는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작년에 “미래를 맡길 만한 정치 지도자가 없다”는 정치적 발언을 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 그는 올해 3월 그룹 사보를 통해 “우리 기업들은 권력의 시녀가 돼 급성장하기도 하고 권력이 바뀜에 따라 도산하는 등 정치변화에 따라 수없이 명멸했다”면서 “그러나 현대는 정치적 변환기에 어떤 ‘무모한 권력자’들에게도 아부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곧이어 3월 말에는 정부의 업종 전문화 정책에 대해서 “각 개별 기업은 나름대로 다 주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5월26일 해운항만청 직원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는 정부의 경부고속전철 건설계획이 시기상조이며 영종도에 건설하게 될 국제공항의 기술 용역을 미국의 백텔사에 준 것은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기술 수준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내외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비업무용 토지 매각문제와 관련하여 아직도 마찰이 끊이지 않는 현대그룹에서는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인지 그의 발언을 개인적인 ‘용단’으로 돌리고 있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개인적으로는 정부정책에 대해서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그룹자체로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낸 적이 없으며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속 시원하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경쟁그룹의 한 임원조차도 정주영씨의 발언을 “그동안 지나치게 당해왔다는 재계의 위기의식을 대변해준 것”이라면서 “개인적으로 그가 용감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5월10일자 프랑스의 <르 몽드>지는 20년 전 朴正熙 대통령 앞에서 부동자세로 답변을 했던 정씨가 이제 업종전문화 같은 정부 정책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고 있다면서 재벌의 목소리가 높아진 점을 지적했다.

 지난 4월22일자 기사에서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을 극구 찬양했던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지도 5월20일자에서는 미묘하게 입장을 바꾸고 있다. 12개 그룹이 석유화학을 주력업종으로 선택한 것을 예로 들면서 재벌들의 ‘고집’이 새로운 정책을 실패로 끝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했다.

‘정부와 사전교감’ 의문 제기돼
 재벌들의 응집되고 드높던 목소리가 한풀 꺾인 후 재계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쏠리고 있다. 대정부 성토에 휩쓸리지 않거나 그 반대편에 선 ‘아군’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자연히 최근 정부의 대재벌 정책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면서 상대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고 있는 삼성그룹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다른 그룹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황증거’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삼성은 주력업체 선정에서 큰 득을 보았다. 삼성반도체가 삼성전자와 진작에 합병되어 있어서 다른 그룹과 달리 여러 분야를 주력업종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그룹이 종합상사를 주력업체로 신청해서 탈락된 데 비해 삼성만큼은 그룹의 주력기업인 삼성물산을 ‘주력기업’으로 신청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국이 무역업체를 주력업체에서 제외시킬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삼성은 어떤 다른 그룹보다도 정부정책에 능동적이고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중소기업 계열화 방안’이 좋은 예다. 이것은 4월 말 임시국회에서 중소기업 육성책의 하나로 보고된 뒤 상공부가 검토중인 시안이다. 대기업의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중소기업을 계열화시키자는 취지로 대기업의 중소기업 계열사에 대한 자본참여 규제를 완화하고,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한을 폐지하며,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이다.

 또 李健熙 그룹회장은 페놀오염사고가 일어난 지 며칠 후 재벌 가운데 제일 먼저 환경보호대책을 당국에 보고했다. 작년 9월에는 제일제당에서 관악산 가꾸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 후 바로 환경처의 산하기관인 환경보존협회에서 각 기업마다 산 하나를 정하여 관리해줄 것(一社一山운동)을 요청하더라는 것이다. 이회장이 전경련 회장단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다.

 다른 그룹들에서는 정부와 삼성이 교감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하여 한 재벌그룹의 정세분석팀이 작성한 ‘삼성동향파악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삼성그룹에 대한 업계의 시각은 ‘6공화국 들어 대기업 가운데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그룹’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데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정경유착’과 ‘밀실행정’의 유산
 첫째 삼성그룹은 오랜 숙원사업인 석유화학 항공 자동차 방송사업 등에 참여했거나 진입태세를 확립하고 있다. 둘째 대기업 부동산문제, 북방정책 관련사업 추진 등 최근의 상황에서도 타그룹보다 기민하고 탄력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손해도 적게 보고 선두 주자로 나서는 등 정부시책을 앞질러가고 있다. 셋째 특정세력을 중심으로 여권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유지하여 정부시책과 관련된 사업 추진에서 여러 가지로 이득을 향수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교감의 통로로는 申鉉碻 명예회장을 주축으로 한 전직 고위관리들과 상공부로부터 각종 경제정책에 대한 연구를 의뢰받는 삼성경제연구소를 꼽고 있다.

 삼성그룹 경영개발팀의 김흥식 이사는 “삼성과 정부와의 ‘교감설’은 우연한 일들을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고 정부정책으로 피해를 본 그룹의 시새움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정권과는 不可近不可遠하라는 선대의 유언은 여전히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밝혔다.

 “업종전문화 시책만 하더라도 여신관리제도 개편이 우리 그룹에 큰 영향이 없겠다싶어서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라면서 확대해석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개된 정보만 잘 수집하고 분석해도 정부정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에 가득한 상호불신의 안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긴 역사를 가진 ‘정경유착’과 ‘밀실행정’의 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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