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 예술에 보혁 갈등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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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서예가들 탈장르 시도 … 원로들은 “못된 붓장난” 비판

 지난 4월 창립전 이후 서단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현대서예협회(현대서협)는 약 1백명의 젊은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이사장 황석봉(42·한국 서예협회 이사)씨는 80년대 후반 유화재료로써 파격적 서예를 선보였던 김태정씨나, 전종주씨, 현대서각회 등과 함께 현대서예의 흐름을 선도하며 보수 서단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온 인물이다.

 ‘전통의 뒤주’에서 한국 서예를 끌어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대 정신의 접맥이 우선돼야 한다고 믿는 이들 현대서협 회원들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강한 조형미를 추구하고 있다. 서예라기보다는 회화에 가까운 현란한 채색과, 클라주 형식의 도입, 청동을 소재로 한 입체작품 및 동판에 부식한 영문 서예 등 조각과 판화의 양식을 넘나들며 지·필·묵의 고정관념을 파괴한 창립전의 반향은 즉각 두 갈래로 나타났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한국 서예계에 제3의 길이 나타났다”는 식의 뜨거운 호응을 보인 반면 법첩(法帖·서예교본)을 중시하는 원로들로부터는 못된 송아지들의 붓장난이라는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있다.

 물론 서예계에서는 이번 현대서협의 창립전 이전에도 탈장르적 경향이 두드러진 일련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전시들은 ‘김태정전’이나 ‘서화의 동행전’ 등으로 전시명칭에 ‘작품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현대’라는 모자를 씌워 서예전으로 못박지는 않았다.

 “선풍기 한 대를 만들어도 정품의 부품들로 조립해야 신선한 바람이 나오는데, 하물며 10년 먹을 갈아도 초보자 꼬리표를 떼기 어려운 서예의 세계에서 획 하나하나가 서법에 의해 닦여진 것이 아닐 때 제 아무리 조형미를 추구한다 한들 그것은 다만 ‘새로운 형상’, 다시 말해 붓장난에 불과하다.”

 현대서예의 ‘해독’을 우려한 한 중견작가의 위와 같은 통박은 그러나 ‘현대서예가’들에게 오히려 역공의 무기를 제공할 뿐이다. 서화는 본디 뿌리가 같아 서예와 그림이 별개일 수 없으며 5체의 충실한 수련이 서예의 근본임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더 잘 인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서단 내의 이같은 ‘보혁갈등’은 다시 평단으로 번져 관심을 더하고 있다. 창립전 도록에서 현대서협 회원들의 ‘반란’에 갈채를 보냈던 미술평론가 최병식 씨를 상대로 공주사대 김병기 교수는 《월간서예》 5월호에 반박문을 실어 현대서예의 실체에 의혹을 제기했으며, 최씨는 다시 재반박문을 6월호에 게재, 김씨에게 토론의 장을 갖자고 제안했다. 김교수는 현대서예를 향해 “탈장르인가, 탈본질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며 ‘反書의 書’로 현대서협을 옹호한 최씨의 논리는 서예의 본질을 이탈한 ‘신사대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공박했다. 한편 최씨는 “서예의 본질을 영원불변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대에 부응키 위해서는 서예 개념에 대한 부분적 궤도수정이 필요하며 그 방법론으로서 서예와 유관된 모든 예술 영역을 넘나들어 보는 것은 현대서예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극히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회원단체의 양분·대립으로 그렇지 않아도 ‘먹물싸움’이라는 여론의 질책을 받아온 서예계에서는 이번 논란이 자칫 인맥분란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도제교육에 의한 인맥전승의 고질적 풍토 속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서단 내부의 ‘쇄국정책’을 타개하는 데 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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