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양식이 곧‘文化’
  • 강신표(한양대교수 문화인류학) ()
  • 승인 1990.01.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대별로 본 생활과 문화

 문화는 결코 문화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文化’라는 글자에서 ‘文’의 자귀적인 뜻은 紋樣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어떤 문양이 있는가를 일컬어서 문화라고 했다. 그래서 문화를 생활양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문화인들만이 생활양식이 있고 일상인들은 생활에 아무런 양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문화의 개념이 일부에서는 왜 그러한 방식으로 통용되어왔을까? 그 원인은 우리의 지난 역사가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왕조의 전통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특권층의 양반이 있고, 그 밑에 일반 양민이라는 서민 백성대중이 있고 다시 그 아래에 노예에 버금가는 머슴과 하인 같은 이른바 ‘쌍것’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생각으로는 이해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불과 1백년전까지 제도적으로 있었고, 그 잔해가 ‘지금’ ‘여기’에 우리의 무의식속에 남아 있다. 양반은 한자를 알아야하고, 아녀자와 양민은 언문(한글)이나 알아야 하고, 쌍것이 글자를 알면 안되는 것으로 여겼던 과거 역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곧 문화를 아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었다. 자기들만이 한 문자(漢文)를 알아야 하고, 알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진 양반들은, 자기들만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 서서히 소개되기 시작한 외래 박래품은 사회의 특권층에게만 알려질 수 있었다. 이른바 서양적인 생활양식은 특권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신분서열적인 전통사회의 생활관행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이 있듯이 신분서열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 대하여 일종의 모범을 보여주고 실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권위를 지녔던 것이다.

서양 박래품은 생활하는 데 편리함과 즐거움을 제공했을 뿐, 그 자체에 일상적 윤리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거기서 어떤 윤리적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평등과 자유라는, 보다 본질적인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전통윤리와는 너무나 어긋나기 때문에 당시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따라서 상층 지도층은 박래품을 통해 전통적 생활관행과 동떨어진 생활문화를 오직 즐겼을 뿐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이들 외래 생활관행과 박래품은 이 사회의 계층적 차별과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접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특히6?25의 50년대에는 서양문물에 대한 본격적인 개방이 이루어진다. 60년대에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서양 박래품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70년대에는 서양적 생활관행을 이땅의 생활양식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과학하자’는 구호가 ‘새마을운동’과 어울려 도시와 농촌을 풍미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청바지 통기타’로 대표되는 서양적 생활리듬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흥분시켜놓았다.

80년대에는 이러한 60년대와 70년대의 ‘운동’과 ‘흥분’에 근본적인 반성이 시작됐다. 윤리성이 결여된 경제건설로부터 사회정의를 자각하게 되었고, 국적이 없는 특권층의 생활양식은 전통문화를 다시 불러오게 한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미 일반 대중들은 상업주의적인 소비생활에 무분별하게 빠져들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운동’과 ‘흥분’이 우리의 생활문화를 혼란으로 이끈 셈이다. 상업주의적 생활관행속에 대중의 문화생활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냐를 이제야 본격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셈이다.

21세기를 10년 앞두고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어떠한 내용으로 문양을 만들것인가? 우리의 전통에 뿌리박고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생활문화를 키워나가는 데는 우리의 모든 지혜를 함께 모아야 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