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野결집후 야권통합이 定石”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0.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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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富榮씨가 말하는 정국 기상도/金大中총재 입지약화 현재로선 “득될 것 없다”

“3당통합으로 탄생된 보수대야합이라는 공룡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도저히 생존해나갈 수 없는 체제이지요.”

지난 5일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한 전민련李富榮상임공동의장(48)은 獄中 사색의 산물로 ‘공룡도태론’을 내놓았다. 그는 도태론의 한 근거로 “밀실안에서 윗사람 몇몇이 순열조합식으로 짝맞추기한 것을 국민의 정치수준이 그대로 받아 들일 리가 없다”는 필연론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손으로 다시 짜여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4월11일 범민족대회 예비회담 추진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돼 2심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으로 1년여만에 출감한 李의장은 출감 8일째인 지난 13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앞으로의 거취, 거대여당 탄생에 따른 재야권의 대처방안 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시국관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3당통합 소식은 교도소안에서 신문을 통해 접했고, 그 배경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았다는 이의장이 3당합당의 배경으로 지목하는 요인들은 다음 네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조직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성장한 민중의 역량이 지배세력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비쳤던 것 같다. 이들 민중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정치구도가 지배세력에게는 필요했을 것이다. 둘째, 현실적으로 여소야대의 정치구도가 재계나 집권세력에게는 몹시 불편하고 귀찮은 걸림돌이었음에 틀림없다. 셋째는 경제토대와 관련된 것인데, 그동안 저기술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바탕해 있던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구조가 이제는 자본집약적이고 고도의 기술중심적인 구조로 재편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구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넷째는 남북통일과 관련된 문제인데, 사회주의권의 대격변과 집권층의 북방외교 성과로 북한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는 판단이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근거없는 자만을 불러일으켜 북한을 흡수통합할 수 있다는 전망마저 갖게했고, 마침내는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묘한 시기에 나왔다”

이의장의 석방은 미묘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재판부는 그에 대한 구속취소 결정이 법적 절차에 따른 조처일 뿐 정치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치세력화 여부를 둘러싸고 ‘즉각창당론’ 과 ‘시기상조론’이 맞서 있던 재야에서 3당통합이후 일단 창당론쪽으로 분위기가 잡혀가는 시점에서 이의장이 석방된 것은 그냥 넘겨버리기 힘든 대목이다. 이의장 자신도 “큰 간격을 보이던 즉각창당론과 시기상조론이 서로 가까워져가는 미묘한 시기에 나왔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재야는 현재 순수운동권 단체의 최대결집체인 전민련과 합법정당 결성을 겨냥하는 진보정당결성준비모임으로 양분되어 있다. 재야 40대 기수의 하나인 張琪杓씨가 주축이 되는 진보정당모임은 지자제실시 이전의 창당을 목표로 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인적 구성이나 자금력에서 고전하고 있고, 金槿泰씨가 이끄는 전민련도 3당통합 이후 내부에서 정치세력화 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까닭에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태다. 따라서 재야는 조만간 내부 의견을 정리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선택의 시점에 놓여 있다.

재야의 한 인사도 “대중의 정치불신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결단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운동권의 정치세력화는 개개인의 결단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집단적인 정치세력화에 이의장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게 이 재야인사의 진단이다. 이의장 자신은 주변의 이같은 관측에도 불구하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그가 구상하는 범야권의 ‘삼각구도’로 미루어볼 때 그의 재야신당 참여는 일단은 기정사실화쪽으로 기운듯 싶다. 그가 피력하는 단기적인 범야권 삼각구도는 대충 다음과 같은 모양새를 띤다.

“현재 야당으로서 가장 큰 세를 형성하고 있는 정파는 평민당이다. 그러나 평민당이 민주당 고수파와 재야를 자신의 주도 아래 흡수통합하려 한다면 소모적인 긴장만 야기시키고 야권통합 기운을 파편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고수파나 재야를 상대로 개별적 접촉을 통해 평민당 영입을 시도한다면 숫자는 늘어날지 몰라도 전체 야권통합에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민주당 고수파의 경우에도 자신들의 출신지역에 존재하는 지역감정 때문에 평민당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거나 평민당 金大中총재의 거취에 대해 논란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각자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당면과제다.”


남의집 사정 먼저 거론하는 것은 비현실적

범야권에 대한 그의 정세파악과 전망은 민민권(민족민주운동권)의 세력 결집을 전제로 한 ‘민주대연합’을 이룩한 뒤 그 다음 단계인 ‘통합야당’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민민권에서도 정치세력화가 깊이 논의되면서 합의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정치세력화의 기본전제는 기층부문의 합의다. 전민련쪽에서 먼저 정치세력화 원칙의 지지결의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민련 고문단의 민중민주정당 결성 서한도 촉진제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민민권이 힘을 결집하게 되면 평민, 민주고수파, 민민권의 3자 상호공존원칙 아래 민주대연합의 효율적인 형태로서 통합야당을 제의하게 될 것이다.” 3자가 각자 입지를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야권통합이 논의되어야 하며, 내부문제도 미처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집 사정을 먼저 거론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게 이의장의 상황 판단이다.

그는 또 현시점에서 평민당 김대중총재의 2선후퇴 주장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중간평가 연기합의와 광주문제 · 5공청산에 대한 원칙없는 합의 등 김총재의 정치적 무책임은 면탈될 수 없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김총재의 입지약화는 민주세력에게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야권통합 과정에서 논의돼도 늦지 않다. 위기에 처한 민주세력의 활로를 뚫는 데 김총재가 마지막으로 기여할 수 있는 지혜와 결단을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이의장이 재야의 신당결성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경우 예상되는 걸림돌도 적지 않다. 우선 현재의 전민련이나 진보정당모임이 기충대중조직의 뒷받침 없이 상층부 중심으로만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해 이의장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전노협 등 전국적인 대중조직 자체내에서 정치세력화를 요구하며 지자제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지방의회에 참여하되 평민당이나 민주당 고수파의 옷을 입고 나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새옷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노동 · 농민단체 등 밑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다”고 답변한다. 그는 다시 한번 “재야정치세력화의 기본전제는 기층부문의 합의”라고 강조한다.


대중단체 중심부가 올라와 운동 지도해야

이의장은 재야에서 흔히 쓰이는 ‘명망가’라는 말을 꺼린다. 재야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해보는 그의 시각을 이해하면 왜 그가 명망가라는 말을 기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재야운동은 3 · 1만세사건의 33인식 운동형태로서 지식인과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다. 사회운동은 소수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이해관계가 우선시되고 대중들의 참여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대중운동이다. 사회운동에서는 대중단체의 중심부가 올라와 전체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 지금의 재야 형태에 관해 그는 “재야로부터 사회운동쪽으로 방향을 틀어가는 과도기”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재야의 정치세력화는 어디쯤에 자리잡을 수 있는가. “재야운동과 사회운동의 중간형태가 정치세력화”라는 게 그의 견해다. “중간층 지식인과 노동 · 농민운동계층이 함께 참여해야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자리잡을 수 있다.”

재야의 정치세력화가 자칫 여권이 의도하는 보 · 혁구도의 고착화에 말려들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이의장은 반론을 제기한다. “보 · 혁구도에 말려든다고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기득권과 관련시켜 얘기한다고 생각한다. 재야의 정치세력화는 보 · 혁논리의 허구성을 들추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의장은 대학교 후배인 張琪杓 · 金槿泰씨와 더불어 재야의 40대 기수로 손꼽히기는 하지만 학생운동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두사람과 달리 학생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도 “학생운동에 열심히 참가는 했지만 주동은 아니었다”고 술회한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다가 해직되면서 재야운동가로 변신한다. 75년 이른바 ‘동아투위’사건으로 처음 구속된 이후 79년 계엄포고령위반, 86년 5 · 3사태 배후조정혐의, 88년 전두환 · 이순자씨 구속처벌 요구 시위 관련, 그리고 지난해 4월의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모두 다섯차례의 옥살이를 했다. 30~40대에 걸친 15년 세월중 7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투옥되었을 때 첫딸인 槿河양은 젖먹이 한살이었고 둘째인 度均군은 태어난 지 사흘째였다. 첫딸 근하양은 이제 16살이 되었고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자식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출감후 좌골신경통과 잦은 설사로 고통을 겪고 있고, 한시 짬도 없이 찾아오는 선후배 동료들을 만나야 하지만 그는 만사를 제치고 ‘근하의 아버지’로서 딸의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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