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리 폭행 이후 기세 꺾인 전대협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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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 ‘학생운동’ 인식 변화…“도덕성 상실” 비판 확산 현 정권 개혁 실천이 앞날 가름할 듯

 한국외국어대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총리서리 폭행사건으로 여론이 들끓던 지난주, 모 방송국의 9시 뉴스 서두는 매우 주목되는 ‘용어변경’ 하나를 담고 있었다. 그동안 사용해온 ‘운동권’이라는 이름을 ‘사회주의 혁명세력’이라고 고쳐 부른 것이다. 일부 신문에서는 ‘좌경’이란 말도 얼마 전부터 ‘좌익’ 또는 ‘극좌’로 바꿔 표현하고 있다.

운동권의 도덕성 상실을 비난하는 고양된 분위기 탓에 이들의 이름을 차제에 새로이 규정한 언론의 ‘자신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예사롭지 않은 변화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공보처의 여론조사는 차치하고라도 요즘 언론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 특히 경험론적 세계관을 펼친다고 할 수 있는 4·19, 6·3세대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에 비추어볼 때 이같은 새로운 용어규정은 어느 정도 사회적인 합의의 수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같은 현상은 더 이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비판적 지지’로 운동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기성세대의 인식전환이 확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학생운동은 이제 민주화운동이 아닌 사회주의 혁명투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는 경향이 조만간 대세를 이루게 된다면 전대협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권은 어느 시기와도 비교될 수 없는 큰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좌익’ 규정, 사회적 합의 수준
 89년 5월 부산 동의대에서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경찰 6명이 불에 타 숨졌을 때, 또 이 해 10월 연세대에서 한 공업전문대 학생이 프락치 활동 혐의로 구타당해 숨졌을 때도 운동권에 대한 비판여론은 “목적은 이해되나 방법이 틀렸다”는 정도의 ‘과격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었다. 그러나 정총리서리 폭행사건은 조작 의혹 등의 꼬리가 붙는 당국의 수사발표나, 마찬가지로 불신을 받는 소위 ‘관제언론’의 그림없는 보도가 아닌 생생한 텔레비전 화면으로 목도하게 됐다는 점에서, 권력의 또다른 ‘자충수’가 없는 한 학생운동권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권위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워낙 큰 나머지 우발적으로 저지른 젊은 학생들의 실수”라거나 “1천5백명의 전교조 교사를 학교에서 내쫓은 사람에게 표시한 최소한의 항의”라고 봐주는, ‘운동권에 대한 일방적 매도’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학생과 국민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폭행사건 다음날인 6월4일 한국외국어대 교정에 일제히 나붙은 이 학교 총학생회장 정원택군(23·경제4)이 보낸 편지는 이념은 접어두고라도 오늘의 젊은 학생들의 정서, 공격적 심성 등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제의 투쟁에서 우리 애국외대는 전국의 백만학도와 4천만 민중에게 청량제와 같은 통쾌감을 주었습니다. 7천3백여 애국외대 청년학도들을 대표하는 저는 어제(6.3)의 투쟁에서 우리 외대인이 보여준 그 기상과 의지를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제 학교를 빠져나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면서 시민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도 통쾌하다’ ‘잘했다’ ‘역시 외대는 외대다’.”

 “이러한 국민의 정서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노태우정권은 강경대 학우를 쇠파이프로 쳐죽여놓고도 반성은커녕 더욱 악랄한 공안통치로 민주주의 압살과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노재봉내각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린 다음 정원식내각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정원식이라는 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89년 전교조를 비인간적으로 탄압하고 심지어 1천5백여명의 선생님들을 해직시켰던 교육탄압의 선봉이었습니다. …이자가 총리 자리에 앉자마자 꽃다운 우리 학우 김귀정 열사는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자는 또한 얼마 전까지 노태우 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조국 영구 분열 책동인 유엔 단독가입을 구걸하러다녔던 것입니다.…”

이 편지는 뒤이어 ‘놈’ ‘자’ 등의 호칭을 계속 사용하면서 ‘이러한 자’의 마지막 강의를 “단결된 힘으로 몰아낸 ‘장거’를 전국의 백만학도가 칭송하고 통쾌해 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또 “노태우정권은 다시금 마지막 발악적 탄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절대 위축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의 발악적 탄압은 절대 강자의 위세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몰린 최후의 발악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장거를 이뤄낸 수배·제적 학우들을 애국외대가 하나되어 구해내자”고 호소하고 있다.

‘사회주의혁명’ 투쟁조직으로 인식돼
 오늘의 학생운동 현주소, 이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구조와 가치관, 행동양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학생운동권의 총 결합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조직·이념 등을 살펴봄으로써 부분적인 해답을 찾아볼 수 있겠다.

 해방 이후 최대의 학생운동 조직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전대협은 87년 이후 ‘엄청나게 넓어진 운동공간’과 ‘김일성 주체사상(주사)의 보급’이라는 두가지 환경이 만들어낸, 급진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조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대협은 87년7월 이한열군 장례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모인 전국 총학생회장들이 건설에 합의, 이후 8월19일 충남대에서 95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발족됐다. 현재는 1백79개 대학이 가입해 있으며 이중에는 30여개 전문대도 포함되 있다(12~13쪽 관련기사 참조). 이 조직은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에 불과하지만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전국 학생운동의 대표기구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5기 출범식을 마친 전대협은 보다 강력한 조직으로 전환하기 위해 전총련(전국총학생회연합) 결성을 서두르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각 학과 학생들까지 하나로 묶는 전학련(전국대학생연합)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국이 여론의 반전을 계기로 전대협과 일대 ‘결전’을 벌이기로 한 것도 사실은 이같은 ‘백만학도의 단일 조직화’기도를 서둘러 막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엄청난 자금력에 학내언론도 완전 장악
 전대협은 강령에서 “백만 청년학도의 창조적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7천만겨레의 염원이 자주 민주 통일의 새 조국 건설과 미래의 주인인 청년학생의 정의로운 삶을 위한 구국의 선봉대로서 투쟁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투쟁의 내용인 대표적인 정치강령은 다음과 같다.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의 부당한 정치·군사·문화적 간섭과 침략을 막아내며 조국의 자주화를 이룬다 △친미군사정권의 식민지 파쇼통치를 철폐하고 완전한 사회민주화를 실현한다 △조국의 영구분단을 막아내고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원칙아래 조국의 통일을 이룬다.

 전대협 운동권 학생들의 권위주의적 행태, 쇠파이프와 화염병 등을 ‘무감각적으로’ 사용하는 폭력시위, 과학적 분석과 사고가 아닌 교조주의적 현실인식, 그리고 획일화된 ‘투쟁성’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김일성 주체사상’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14~15쪽 관련기사 참조).

 이들의 투쟁노선과 주요 정책이 결정되는 곳은 3기(임종석 의장) 발족과 함께 신설된 정책위원회. 안기부 등 공안당국이 그동안 발표한 수사결과를 종합해보면 전대협 정책위원회는 핵심 주사파인 ‘자민통’ ‘조통그룹’ 등 3~4개 주사그룹에 의해 장악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주사그룹은 ‘목소리 방송’으로 유명한 통일혁명당의 후신인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지도를 받고 있으며 대남방송 <구국의 소리>를 청취,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대학가에는 <구국의 소리> 채록집인 ‘새세대’ ‘새날’ ‘구국의 광장’ 등의 유인물이 흔히 뿌려지고 있으며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 가운데는 김일성 전기를 소설화한 북한 ‘4.15문예창작단’의 《봄우뢰》(일명 ‘고추잠자리’)나 김정일 전기인 《거인의 탄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운동권에 대한 당국의 수사결과 발표 때마다 제기된 ‘용공조작’ 운운 주장이 요즘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로도 이들의 노골적인 친북성향 노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주사파나, 전대협 속의 비주류인 마르크스·레닌주의파(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의 시대착오적인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운동권 학생들은 대규모의 조직력뿐 아니라 학내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고 엄청난 자금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이전의 학생운동과 크게 구별된다. 지난 6월1일 부산대에서의 제5기 출범식 때 도시락 등 행사비 일체로 4억~5억원을 사용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전대협 예산은 형식적으로는 가입 대학 총학생회가 1%를 의무적으로 내게 돼 있는 총학생회비로 짜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활동자금의 10%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모든 대학의 총학생회비가 전대협의 자금이며, 여기에 자판기 식당 서점 등 자치운영 사업과 각종 행사에서 티셔츠 노래테이프 판매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까지 합하면 수십억대가 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요즘 운동권은 ‘프로’, 즉 직업적 혁명가들로 불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부산대에서와 같이 한꺼번에 4만개의 도시락을 주문할 수 있게 되고 총학생회 사무실에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팩시밀리 고속복사기 인쇄기 등을 갖추고 있는가 하면 집회에서는 고성능 대형 앰프, 전자오르간, 멀티비전과 현란한 조명장치 등을 동원하여 일반 사회 종교단체가 벌이는 대규모 집회와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시위현장에서는 2~3대의 시위지휘 봉고차량까지 등장해 경찰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급격히 퇴조하지는 않을 듯
 당국의 집중수사와 함께 대학 총학장들과 교육부는 전대협을 비롯한 운동권학생들의 활동환경을 제거하기 위해 자금줄인 총학생회비 원천징수와 자치사업 등을 규제하는 한편 학사관리를 엄격히 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정총리서리 폭행사건에 대한 외대생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전대협(학생운동권)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일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급격히 퇴조할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러한  예측의 근거로 강경대군 사건으로 촉발된 ‘5월시위’ 이전까지는 각 학교마다 집회인원이 1~2백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힘이 다시 커지느냐, 그렇지 않고 점점 하향곡선을 그릴 것이냐는 현 정권이 어떻게 개혁을 실천하고 또 나머지 정치일정을 여하히 제시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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