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갈비탕이 먼저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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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 못 받는 정치광고···중요성엔 동의, 홍보비엔 인색

 “흑백사진에는 줄무늬 양복을 입어라. 메이크업, 옷 입는 법 등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유세연습까지 다 도와드립니다. 이제 검은 양복일랑 저희에게 잠시 보관해 두십시오.”

 “40%의 부동표를 움직이는 열쇠.”
 지난 5월의 월간종합지와 주간지에는 광역의회선거에서 후보들의 홍보전을 대신해주겠노라는 정치광고회사들의 ‘광고’가 열댓개씩 한꺼번에 실렸다. 정치경험이 거의 전무한 무명의 정치인이라도 완벽한 상품으로 ‘포장’해내어 당선을 보장하다는 이들 광고회사의 선전은 후보자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유혹일 수밖에 없다. 광역의회 선거에 나선 2천8백여 후보 중 재력이 극히 취약한 민중당과 시민연대회의 후보, 일부 무소속 후보들을 제외하면 후보들의 90% 정도가 이런 대행업체에 홍보전을 맡기고 있다.

 ‘대리전’에 뛰어든 정치광고 업체는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이야기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문 정치광고 업체는 폴리콤 코마콤 태천기획 세인에이전시 범아기획 등 1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황금알을 낳는 2천억 지자제 광고시장’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기초의회 선거 즈음에는 20~30여 개 대행업체가 새로이 생겨났다.

 기초의회 서거 직후에 다시 ‘정치광고 물’을 먹은 전문 인력들이 독립해 새끼를 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지금은 어림잡아 2백여 곳이나 된다. 서울 충무로·을지로에 즐비한 상업광고 대행업체들도 선거 동안은 정치광고 일을 맡고 있다.

 여론조사 요원을 비롯한 15명 내외의 전문 인력을 거느린 대형 광고회사도 있지만, 이런 인력 없이도 일단 후보만 잡으면 다른 일은 인쇄소나 전문 스튜디오에 맡길 수 있는 게 정치광고의 특성, 그래서 오피스텔의 방 한 칸과 전화 한대, 전문인력 한두 명만으로도 ‘정치광고 전문집단’을 자임하며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하게 된 것이다. 한 정치광고인은 “눈깜짝할 사이에 전국 방방곡곡, 심지어 제주도에까지 정치광고 업체가 생겼다”고 혀를 내두른다. 기초의회 선거 당시 경기도에서는 지역신문 편집국장 출신과 국회의원 낙선자 등 2명이 거창하게 선거전략연구소를 차려 경쟁후보 2명을 동시에 맡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연출했다.

광고회사 우후죽순···덤핑홍보 많아
 정치광고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개 두갈래로 나뉜다. 즉 상업광고에 종사하다 “정치인도 하나의 상품이고 투표행위도 구매행위의 일종”이라는 논리로 정치광고에 진출한 ‘광고쟁이’들과 정치인들의 보좌관이나 선거참모 등으로 홍보일을 돕다가 정치광고쪽으로 아예 나선 ‘정치꾼’들이다. 그러나 최근 지자제를 전후해 출현한 정치광고 집단 가운데는 ‘학생운동권 출신’이 압도적으로 않다. ‘정치적 관심과 감각’은 있는데 마땅한 직업과 재력이 없는 운동권 출신으로선 머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정치광고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정치광고는 ‘광고감각’ ‘정치감각’ ‘운동감각’이 어울려 만들어지는 셈이다.

 ‘대리전’의 수행범위는 후보들과의 계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략을 책임지는 경우에서부터 단순히 홍보물만 만들어 주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비용은 대개 여로조사까지 일괄적으로 맡는 경우는 2천만원에서 3천만원까지, 그외 홍보물만 제작하는 경우는 대개 7백만~8백만원선. ‘지자제 특수’를 노리고 최근 우후죽순격으로 나타난 광고대행사들은 3백만~4백만원에 ‘덤핑 홍보’를 맡기도 했다.

 당초 정치광고업계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몇몇 기획사는 당초 지역여론조사, 선거전략 개발, 홍보물 제작에 이르기까지 ‘패키지 상품’을 후보자들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후보들이 최소한 1천만원 정도가 드는 지역여론조사를 꺼리는 바람에 거개가 단순홍보물 제작만 맡게 되었다. 실제로 선거비용 4억원을 쓰겠노라고 장담한 강동 지역의 한 후보는 여론조사를 권하는 대행업체에 “그 비용이면 차라리 조직원을 한명 더 쓰고 갈비탕을 한그릇 더 사는 게 표에 직접 연결되지 않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선거전략의 체계화·과학화·합리화를 이끄는 여론조사 없는 정치광고는 ‘포장술’에 그치기 십상이다.

 물론 조직관리나 선심공세는 아예 포기하고 홍보쪽에 운명을 거는 후보도 있다. 송파에서 출마한 신민당 후보 ㄱ씨는 선관위에서 허용한 선거자금 한도액만 쓰되, 그 중 80%를 홍보비로 쓰겠다며 광고대행사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광고인들은 홍보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갈비탕이 즉효”라는 후보자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부랴부랴 고친 민자당 후보 연설문
 홍보물 제작을 위임받은 대행사들은 주로 법정 벽보 1종, 공보1종, 개인 전단 3종 등 7종의 선거홍보물과 연설문 등을 작성하게 된다. 이 홍보물 제작과정에서는 반드시 후보자의 특정한 이미지를 형성해내야 한다.

 ‘이미지 만들기’에서 정치광고인들이 유난히 골머리를 앓게 되는 후보가 있다. 선거에 즈음해 소속 정당을 바꾼 후보,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후보들이다. 이럴 때는 억지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심지어 날조까지 해야 한다.

 ㅂ기획은 최근 모지역의 민자당 부위원장으로 있다가 공천을 둘러싼 조직분규로 탈당해 민주당으로 출마한 한 후보를 맡았다. 민자당 경력만 “선명성과 차별성을 지닌 야당 후보”로 그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심끝에 그가 4·19가 일어난 해에 대학 1학년이었다는 점에 착안해 어렵사리 야당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강남지역서 부동산 사업으로 큰 돈을 번 무소속 후보 ㅇ씨는 ㄱ기획을 통해 “강남지역의 겸손한 일꾼”으로 훌륭하게 포장되기도 했다.

 6월5일 ㅊ기획은 후보들에게 일찌감치 작성해준 유세 연설문을 황급히 고치느라 법석을 피웠다. 당초 이 대행사는 5월의 시국상황을 감안해 민자당 후보들에게 “뼈를 깎는 각오로 일하겠다. 여당이 아무리 미워도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여당이 필요하니 채찍질하는 심정으로 밀어달라”는 요지의 연설문을 작성해주었다. 그러나 정원식 국무총리서리의 ‘외국어대 봉변’이 있고난 뒤 후보자들로부터 “최대한 공격적으로 써달라”는 주문을 받고 고쳐쓴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후보들을 포장해야 하는 정치광고인들의 고민도 많다. 그런 이들을 잘 포장하면 할수록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선거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유권자들을 기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업광고만 하다가 이번에 처음 정치광고에 손을 댔다는 ‘A FORTY-Agency'의 오현인씨는 “정치인 광고는 상품광고와는 또다른 차원인 것 같다. 자신을 무조건 미화시켜 달라는 후보를 접하고 나니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선거조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털어놓는다. 광고대행사들이 이번 선거에서 가장 많이 동원한 개념은 “깨끗함, 신선함, 전문인”의 이미지이다. 서울커뮤니케이션의 이두엽 대표는 “여론조사 결과 유권자들이 이런 후보들을 가장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며 “전략적 개념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후보들이 실제로도 그런 내용을 갖추었으면 한다”고 덧붙인다.

“그래도 근엄한 게 좋다”
 문안을 다 작성하고 홍보물을 촬영하는 과정에서도 광고인들은 후보들과 한차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다. 이번 선거에서 대부분의 광고대행사는 전문 화장사·촬영기사를 고용해 ‘스튜디오 촬영’을 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젊은 유권자들의 기호에 맞는 자연스럽고 진취적이고 밝은 표정”을 요구했지만, 정작 후보와 선거참모들은 “그래도 근엄한 표정”을 고집했다. 범아기획의 김현식 대표는 “후보들 중 아직도 권위의식과 구태의연한 사고가 남아 있어 사진촬영 때마다 애를 먹었다”고 말한다.

 아무튼 정치광고인들의 출현은 이번 지자제 선거에서 본격화된 새로운 선거풍속도이다. 이들이 만드는 각종 홍보물들도 점점 다양해지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본격적인 정치전략가라기 보다는 ‘세련된 문안작성자’쯤에서 머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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