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의 神話’에 도전하는 율산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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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권 진출 엿보는 삼성과 복합건물 신축 합의 … 재계에선 “영 · 호남 기업의 절묘한 합작”

 ‘일을 끝맺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전 율산그룹회장 申善浩씨는 측근을 통해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가 말하는 ‘끝내지 못한 일’이란 이제 가시화된 율산재기에 필요한 행정절차를 완벽하게 밝는 일이다. 1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捲土重來를 꿈꾸며 은인자중으로 일관해온 申회장이 이제 막 화려한 재기의 청사진이 빛을 발하려는 시점에서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신중을 기하려는 자세로 보인다.

 서울종합터미널 호남선 부지 1만9천평에 세워지는 연건평 4만3천평 규모의 26층 건물. 여기에는 최첨단 시설의 터미널과 호텔, 백화점이 들어선다. 이 계획이 곧 율산 재기의 발판이다. 사실 율산의 재기 움직임은 81년부터 꾸준히 세인의 관심을 끌어왔는데 과거와는 달리 이제 더 이상 안개속의 얘기는 아닌 셈이 됐다. 최근 율산과 삼성그룹측은 지난 88년 6월부터 서로 논의해왔던 서울종합터미널 복합건물 신축계획에 관해 상호 만족하는 선에서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삼성종합건설이 시공하고 신세계백화점과 호텔신라가 임대보증금 형식으로 건축비를 부담하는 대신 삼성측이 백화점과 호텔의 경영권을 갖는 조건이다. 임대형식으로 20년 동안 빌리게 되는데 2번에 걸쳐 10년씩 연장이 가능해 40년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이 건물의 소유주는 율산측이 되며 터미널과 부속상가는 율산이 경영하게 된다. 서울종합터미널의 權純宇 기획담당이사는 준공후 구체적인 이익배분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나 삼성측이 합리적인 구상을 하고 있어 매출이익 개념으로 절반쯤은 율산측이 받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성측은 건축 소요금액을 1천억원 선으로 잡고 93년 준공 예정인데 姜聲得 신규사업 본부장은 채산성이 충분히 있는 사업이라고 밝히면서 ‘누이좋고 매부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삼성과 율산의 결합을 두고 재계에서는 ‘절묘한 합작’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명분을 찾는 율산과 실리를 쫓는 삼성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긴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쏟던 율산으로서는 땅을 기반 삼아 기사회생의 계기를 잡은 셈이 됐고 롯데의 거대상권에 밀리기만 하던 삼성계열의 신세계백화점에게는 황금상권인 강남 진출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삼성측은 그전까지 강남지역에 백화점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여의치 않았었다.

 이 합작사업에 대해 유통업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영업력이 뛰어난 삼성이 마침내 강남권에 진출, 주변업계를 위협함은 물론 롯데와 불 뿜는 선두다툼을 하리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은 롯데 쇼핑에 비해 매출액은 71% 수준이나 매장면적에선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대표적 영남기업인 삼성은 호남기업인 율산과의 합작으로 호남지역에 삼성의 기업이미지를 제고, 영업권이 약한 호남권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확대해석도 나오고 있다.

“빚 다 갚은 뒤 새사업 구상”
 율산그룹의 공중분해로 그동안 빚 받을 길이 막연하던 채권은행들도 율산 · 삼성 합작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율산의 합작파트너들이 그동안 대부분 부실업체들이어서 사업성이 밝지 않았으나 이번엔 삼성이라는 국내 1위의 재벌과 손을 맞잡게 돼 결손을 보지 않고 순조롭게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새로 지어진 경부선에 비해 낡고 불편한 호남 · 영동선이 현대화되어 편리한 시설을 사용하게 된다는 낭보를 가져다 주게 됐다. 또 인근 반포천을 복개해 주차장과 도로를 개설, 주변 교통여건이 크게 개선되는 등 이점이 많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위야 어떻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기업으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율산으로는 특혜라는 인식을 주지 않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반응을 일단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율산과 삼성의 복합건물 합작건에는 그러나 아직도 걸림돌이 남아 있다. 채권은행단의 부채상환방법에 대한 합의가 아직 도출되지 않고 있다. 현재 채권은행단 간사은행인 서울신탁은행이 최종합의안을 검토하고 있는 단계이나 총부채와 이자산출방법 등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자계산에 있어서 큰 편차 때문에 채권단인 7개 은행과 신용보증기금의 상호 이해관계가 얽혀, 의견이 각각 다른 것이다. 현재 원금 4백50억원(대손상각분 포함)과 이에따른 이자를 합하면 1천3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율산측은 채권은행단이 어떤 합의를 이루든 전액 상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30%가 넘는 연체이자율도 적용되나 이를 감수할 것이며 이미 은행에서 못 받을 것이라고 포기해버린 대손상각분 1백90억원과 이자도 갚겠다는 것이다.

 “돌발변수가 없는 한 4개월 후에는 파일을 박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지낸 시간이 10년입니다. 은행돈 한푼없이 현찰로만 장사하면서 버텨왔습니다. 그동안 회장님이 견뎌낸 각고의 세월도 눈물겹습니다. 빚을 남김없이 갚고 난 후에는 새 사업 구상도 가능하겠지요. 이때쯤이면 옛 율산맨들이 모여들기를 기대해볼 수도 있겠지요.” 율산과 고락을 함께 해온 權錫忠전무는 매우 조심스럽게 율산의 앞날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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