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돈가뭄에 ‘허덕허덕’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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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보유 주식 팔 수 없어 최악의 자금난···위기관리 능력 못 키운 ‘자업자득’

 대신증권을 모기업으로 하는 대신그룹은 지난 5일 임원들이 봉급을 지난해 수준으로 동결하기로 자진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35명에 대한 봉급 인상분을 줄여봐야 연간 1천2백만원의 비용절감효과를 갖지만 상징적 의미는 크다. 대신증권이 경영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임원봉급동결’ 카드를 처음 들고 나왔지만 지난해부터 증권사들의 절감 노력은 두드러졌다.

 2년이 넘게 증시는 끝없이 가라앉고 있다. 심한 무기력증에 빠진 증시가 마침내 6백선마저 위협받던 지난 6월초 각 증권사는 비상이 걸렸다. 각 증권사 기획부는 증시상황에 따른 단계별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ㄷ증권사 기획부의 한 관계자는 “증시의 장기침체로 경영여건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경영난은 최악의 상태”라고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들어오는 돈이 적다 보니 하루를 꾸려가는 데 필요한 돈을 꾸기에 허덕이는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증권사 관계자들은 갈수록 최악의 상황으로 몰린 것은 주식을 과다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팔아야 되는데 팔수 없는 딱한 사정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돈이면 버텨보겠지만 남의 돈(특별담보대출 등)으로 사들여 더 문제라며 이자부담은 피를 말리고 있다고도 했다. 4년 전 주가상승기 때는 증권사들이 너도나도 상품 유가증권 보유한도를 늘려달라고 감독당국에 로비까지 하는 형국이 벌어졌는데 완전히 상황이 뒤바뀐 것이다.

 팔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매각 자제 요청 공문이 내려왔지만 사실상 매각지시로 읽어야 하는 증권당국의 방침이 그렇거니와 투자자의 매운 눈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증권사들이 보유주식을 장에 내다 팔면 당연히 주가는 더 떨어질 것이고 이는 “기관 투자가로서 증시안전판 역할을 해야 할 증권사들이 주가 떨어뜨리기에 나서고 있다.”는 거센 비판을 받을 게 불을 보듯 하다. 이것이 두려워 주식을 그대로 갖고 있자니 증권사들은 죽을 지경이다. 증권사들은 교체매매를 명분으로 채권을 시장에 내놓고 있을 뿐 주식은 한주도 팔지 못하고 있다. 주식보유액이 지난해말에 비해 전혀 변동이 없다. ㅅ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가 주식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해 시장조절 기능을 수행해야지 파는 것을 죄악시하는 풍토는 잘못된 것”이라고 성토했다.

덩치 큰데 수입 적어 ‘돈꾸기’에 급급
 지난 5월말 현재 25개 증권사가 갖고 있는 상품 유가증권 규모는 6조4천5백93억원이다 지난 88년말에 비해 3조5천9백8억원어치가 늘어났다. 이는 정부가 꺼져가는 증시를 회생시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89년이후 증권사에 수차례 지원한 특별담보대출(증시매입자금)로 계속 주식을 사들인 데서 기인한다. 특히 89년 ‘12·12조처’ 후 90년 2월까지 9천6백25억원의 ‘특담’으로 산 물량이 크다. 이 주식들은 대부분 종합주가지수 8백40포인트대에서 사들인 것이어서 내다 판다고 해도 평가손은 엄청나다. 증권 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4조7천억원의 주식을 내다 판다고 가정할 경우 평가손이 대략 1조원 정도는 될 것이라고 추정하다. 팔기도 여의치 않은 상태지만 팔아도 막대한 손해를 봐야 하는, 진퇴유곡의 상황에 증권사들은 직면해 있다.

 증권사들이 계속 궁지에 몰린 것은 우선 장이 나빠 들어오는 돈이 적은 데서 기인한다. 중개기관인 증권사는 가장 기본적인 수익이 주식의 중개비용인 위탁수수료 수입인데 최근 하루 거래량은 4~5백만주가 고작이다. 86년에서 88년 3개년 동안의 활황 때 불려놓은 덩치를 지탱하려면 이 정도 수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느 증권사 관계자는 25개 증권사가 정상적인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하루 1천5백만주는 거래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증권사의 가장 확실한 수익원인 위탁수수료 수입이 필요한 규모의 3분의 1 수준에서 맴돌다 보니 부족분은 남의 돈을 쓸 수밖에 없다.

 지난 1일 현재 증권사의 단기차입금은 2조5천억원에 달하고 있다. 올해 초에 비해 5천8백억원이 늘어났다. ㄷ증권의 경우 단기차입금은 2천억원 수준인데 4월 중 이자부담만도 25억원이나 됐다. 25개 증권사의 차입금 지급이자는 4월중 3백84억원에 달하다. 차입금에는 은행 단자회사 등에서 빌린 이런 단기차입금 외에도 한국증권금융(증권회사의 은행 역할 수행)에서 빌린 돈, 보험사 대출도 있다. 증권당국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차입금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은 빌리지 않고는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흑자도산 가능성도 있다”
 증권사들의 재무구조는 지극히 좋지 않다. 증권사들은 증시안정기금에 출자한 2조원과 고정자산 등을 합해 약 9조원의 자산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자기자본은 8조원 정도다. 자기자본을 초과해 자산운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운신 폭이 지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증권사들은 이제 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사실 증권사들은 그동안 경영난을 타개하려는 몸부림을 쳐왔다. 광고선전비 전산비 접대비 행사비 간행물인쇄비 차량유지비 등 줄일 수 있는 부문은 대폭 칼질을 해왔다. 노조 등 직원들의 반발 속에 가장 민감한 부문인 인력에 대해서도 손을 댔다. 관리직 사원을 줄이는 대신 유휴인력의 대부분을 영업사원화해 ㅎ증권에서는 노사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벌어들이는 게 적으니 그만큼 많은 식구가 부담이 되는 것이다.

 지루한 주가의 하락이 계속돼 증권사들의 경영은 갈수록 중증환자가 되고 있다. 급기야 종합주가지수가 6백선 붕괴를 앞둔 6월초 증시에는 증권사 도산설이 나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1~2개 증권사가 흑자도산을 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는 풍문이 그럴싸하게 유포됐다. ㄷ증권사 기획부의 한 관계자의 주장처럼 주가가 5백 이하로 빠지고 무차별 투매사태가 오지 않은 한 도산은 성급한 예단일 수 있다.  그러나 6~7월 5개 단자사들이 증권회사로 전환함으로써 증권 산업 내부의 경쟁이 격화되고 거기에 오는 10월 외국증권사까지 가세하게 되면 일부 증권사의 부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게 대두하고 있다.
 대우경제연구소 李漢久 소장은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증권사들이 정책적으로 인수해서 매각이 금지되어 있는 보유증권 만큼의 차입금은 단자금리가 아닌 특별저리자금으로 대환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증시붕괴의 상당한 책임은 국민주 보급과 시중은행의 엄청난 증자 등의 정책을 편 당국에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지 않다. 또 기관투자가의 손발을 묶어놓는 것은 증시침체를 부채질하는 일이고 게다가 증권산업의 개방이 눈앞에 와있다. 그러나 현재의 증권사 경영난은 호황 때 마구잡이 증원 등 자업자득의 측면도 많다는 지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증시침체가 원인이지만 “위기관리 능력을 키우는 데 소홀해온 증권사에 많은 책임이 있다”는 ㅈ증권사 간부사원의 말은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경영의 기술을 닦는 데 소홀했던 증권사로서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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