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조선정책 변화 없다”
  • 볼티모어·이석렬 특파원 ()
  • 승인 1991.06.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韓時海 부위원장 단독 인터뷰

 韓時海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볼티모어의 할리데이 인 호텔은 그를 만나려는 재미동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북한·미국간 말문이 트이면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는 현상인 듯싶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을 적성국가로 지목하여 모든 공식적 접촉을 단절해온 미국은 불과 몇 년 전부터 태도를 바꿔 “두 나라 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평양 정권이 먼저 행동으로 몇가지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미국도 걸맞게 손을 내밀 생각이다”라면서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다. 몇 가지 성의란, 테러 행위를 중지한다는 선언을 할 것, 국제원자력위원회(IAEA) 핵협정을 성실히 이행할 것, 남북한 대화의 실질적인 진전을 위해 노력할 것, 그리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군축함으로써 신뢰구축에 나설 것 등이다.

 이런 주문을 달면서 미국은 88년 가을부터 북경에서 처음으로 두 나라 외교관의 공식접촉을 시작해 지금까지 참사관급이 15법 만났다. 그러면서 미국은 그해부터 북한에 대한 미국인의 여행제한을 완화하는 동시에 북한의 학자·예술인·종교인들의 미국 방문을 환영한다고 발표했다. 비정치적인 민간 접촉의 길이 트이자 그동안 약 30명의 북한 민간인이 미국을 다녀갔다.

 미국 기독교 단체의 초청으로 지난 5월23일 미국에 온 일행 8명의 단장인 한시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은 세상이 모두 잘 아는 정치인이다. 비록 종교단체 모임이기는 하지만 2명의 목사와 한사람의 신학생을 빼고 나머지 5명은 모두 정치적 인물들이다.

 미국 정부가 한시해 부위원장 일행에게 입국을 허가해주고, 또 한달 동안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아무런 제약을 하지 않은 것은 과거에 없던 파격적인 예우로 분명 화해의 몸짓임에 틀림없다.

 오랫동안 북한 유엔대표부 대사로 봉직한 엘리트 관료 출신이며 당의 부부장인 그와 숙소인 워싱턴 교외 볼티모어 할리데이 인 호텔에서 40분간 단독회담을 가졌다. 세련된 용모의 한부위원장은 전날 아침 호텔식당에서 기자와 단 둘이서 아침을 들면서 회견을 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따로 다음날 차분하게 만나자고 할 만큼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지금까지 한국기자와는 회의장 복도에서 주고받은 얘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시사저널》의 질문서를 보니 1시간은 필요할 것 같다”면서 다음날 다시 만나자고 했다. 되풀이되는 내용이 많았던 그의 답변을 정리해서 소개한다.

공교롭게도 한부위원장의 방미는 북한의 유엔가입 결정이 발표된 때와 일치됩니다. 다소 의외였던 이런 결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미 외교부 성명에 나와 있듯이, 우리 입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조선 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이미 오래 전에 유엔가입이 실현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49년 우리는 가입신청을 한 일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유엔가입을 서두르지 않았고, 또 70년대 와서는 유엔가입을 북과 남이 동시에 하는 것이나 어느 하나가 하는 것이 조선통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반대해오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분열을 심화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이 된 뒤에 하나의 조선이 유엔에 들어가자고 주장해왔습니다. 특히 70년대초에 남조선쪽에서 6.23성명을 통해 유엔 동시가입과 교차승인을 정책화해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조선을 영구히 분단하는 것을 합법화하자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 최소한 연방제라도 만들어 하나의 국가단위로 유엔에 가입할 것을 제의했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남쪽이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해서 동시가입을 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가입하겠다는 것을 정책으로 굳혔습니다. 만일에 남쪽만 일방적으로 유엔에 들어가면 통일에도 해롭습니다. 또 유엔에서 논의되는 우리 민족 전반적인 이익과 관련된 문제들이 편견적으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도 가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결코 두개의 조선정책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선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북과 남이 합의하여 동시에 유엔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두개의 조선정책이지만 남쪽의 일방적 조처에 대응해서 우리가 유엔에 가입하는 것은 절대로 정책의 변화가 생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점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남쪽 여론 가운데는 남북한이 유엔 회원국이 되어 관계가 발전하면 대화를 통해 양자관계가 부드러워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엔에 가입한 뒤 우리는 분단된 북과 남이 하나의 의석으로 유엔에서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유엔 무대가 조선의 분열이 아니라 통일에 도움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러나 조선통일 문제에서 남쪽은 두개의 조선정책을 기초로 삼고 있는 만큼 그것이 어떻게 유엔에서 나타날지 두고 봐야 합니다. 만약 남쪽이 계속 두개의 조선정책을 가지고 유엔에서 고집할 경우 결코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계가 부드러워지는가 아닌가는 유엔에서 자리를 잘 잡는가 아닌가보다는 근본적인 조선반도 안에서 서로 불신과 오해를 없애는 데 달린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근본이 되는 군사·정치적 대결을 해소해야만 합니다. 북과 남이 군축을 실현하고 불가침선언을 하여 신뢰를 조성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유엔가입 수락 연설차 뉴욕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혹 김일성 주석도 유엔에 와서 연설을 하고 그 자리에서 수뇌회담을 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이 질문에 한부위원장은 20~30초 가량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가입신청은 언제 어떤 형태로 할 생각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무자들이 절차 규정에 따라서 할 일이지요.

단일 결의안으로 낼 가능성도 있다는 말도 있는데···
 그것은 유엔절차 규정에 위반되는 일이 아닐까요. 단일 결의안을 낸다면, 하나의 의석으로 낸다면 몰라도 남쪽이 일방적으로 가입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단일 결의안을 낸다는 것입니까.

지금 미국 정부쪽이나 언론들은 미·북한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 조성은 북한의 핵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핵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습니까?
 두 나라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호상평등과 자주권의 존중,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어떤 조건을 달고 그것을 강요하면서 관계를 개선하자는 것은 이러한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핵사찰문제를 놓고 말한다면 실제적인 핵 위협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선반도 내의 실제적인 핵위협은 남조선에 배치된 1천여개의 핵무기와 그 핵무기 사용을 좀더 효율화하기 위해서 진행되는 팀스피리트 같은 군사연습이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조선반도에서 핵위협을 없애려면 이런 핵무기의 철거와 미국이 우리나라를 상대해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담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핵무기를 생산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이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 미국이 남조선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고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담보만 한다면 언제든지 우리 핵시설을 국제 감시하에 공개할 것입니다.

주한미군이 가지고 있다는 핵무기의 철수문제와 관련해 미국 합참의장을 지낸 윌리엄 크라우 제독 같은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핵개발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또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북한에 미국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먼저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철수하라고 주장한 일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는지요.
 내가 만난 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그와 유사한 견해를 표시했습니다.

북한이 핵시설에 대한 국제적인 사찰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 뒤 또다시 미국 관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폴 위프위츠 국방부 차관보는 북한이 핵시설을 아예 없애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발언을 국무부 사람들에게서도 들었습니까?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시설을 국제원자력기구 감시하에 공개하라는 것뿐이지요.

1985년 유엔대사로 7년간 미국 생활을 하고 평양으로 돌아간 지 만 6년만에 다시 와 본 미국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이번에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과거 유엔에서 사업하던 때와는 달리 기독학자들의 모임에 참가하는 일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윌리엄 캐리대학 초청강연 등이 목적입니다. 우리 대표단은 미국 장로교단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가는 곳마다 우리 동포들이 열렬히 환영을 해줘서 무엇보다도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유엔에 있을 때는 우리 동포들이 나와 만나는 것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게 돼서 매우 기쁩니다. 또 우리를 맞이해주는 미국 초청단체 사람들도 아주 성의껏 대해줘서 우리는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또 조선인민과 미국인 사이에 친선을 도모하고 정을 두터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국인들의 태도가 과거보다는 더욱 친근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민과 인민 사이에는 사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대표단 이름이 기독학자대표단인데 우리를 초청한 단체들이 조선인민과의 친선을 염원하고 있고, 또 조선통일이 조선인민의 이익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고 있어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됩니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까다롭기만 했던, 그래서 사실상 막혀 있던 ‘북한정치인’의 미국 입국을 이번에는 순순히 허가해주어 한부위원장 같은 ‘거물급 정치인’이 와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미국 조야의 각계인사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로 기억됩니다. 두 나라의 관계개선을 위해 화해라는 차원에서 매우 긍정적인 일로 평가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 정부가 우리 대표단의 입국사증을 큰 문제없이 내주고 또 여러 지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축적되고 발전되면 두 나라 관계도 훨씬 더 좋아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특별히 사증을 주어 미국에 올 수 있게 한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좀더 부드러워진 것이라고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에서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물론 우리 목적은 미국 기독교인들과 만나는 것이고 또 윌리엄 캐리대학 관계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지만 그런 기회에 여러 사람들과 폭 넓게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엊그제 카네기재단 평화연구소 주최 모임과 환영만찬에서 국무부 고위관리들과 만나 긴밀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시아·태평양지역 담당 솔로몬 차관보와 오랫동안 환담을 했다고 하는데, 고위관리들을 몇 명이나 만났습니까?
 카네기재단 연구소 셀리그 해리슨씨가 시간이 있으면 조선문제에 관심이 있는 미국사람들과 비공식적인, 개인적 의견을 교환할 것을 제의해와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 자리에 미 국무부 사람들도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는데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한시해 부위원장 등 힐행의 ‘정치성 체류기간’은 한달이나 됐고 그들의 여행지역도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에서 멀리는 서부의 로스앤젤레스까지 확대됐다. 과거 유엔주재 북한 외교관들의 이동반경이 뉴욕시에서 25마일 이상 벗어날 수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큰 변화이다.

 체류기간 동안 내외의 주목을 끈 것은 민간연구기관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마련한 ‘북한과 미국’이란 주제의 세미나였다. 6월5일 열린 이 세미나에서 한부위원장이 미국의 대 한반도 최고실무자인 국무부의 리처드 솔로몬 차관보를 만났다. 미 국무부의 현직 차관보가 북한 고위관리를 만나 의견을 교환한 것은 처음이다. 특히 북한의 유엔 가입 결정이 있고 난 후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미·북한관계 개선과 관련해 주목된다.

 비공개로 열린 이 세미나에는 솔로몬 차관보는 물론 전·현직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들이 참석해 미국 정부의 관심도를 그대로 반영했다. 이날 모임에는 북측에서 박승덕(조선사회과학원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김구식(조선평화통일연구소 부소장), 로철수(해외동포원호위원회 참사)씨 등 4명이 참석했다. 국무부측에서는 리처드 솔로몬 국무부 차관보, 스펜스 리츠드슨 국무부 한국과장, 로버트 카린 정보연구국 동북아국장, 노먼 헤이스팅스 북한담당관, 로버트 매닝 자문관, 존 메릴 정부연구국 한국담당 과장 등이 참석했다. 전직 행정부 관리 가운데는 리처드 앨런 전 국가안보보좌관, 아서 허멜 전 주중대사가 참석했고, 한국관계 전문가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앨런 론버그 외교협회 아시아담당 책임연구원, 레너드 스펙터 카네기재단 연구원이 참석했다. 특히 이번 세미나에는 미 중앙정보국의 조제프 클레어 한국과장, 모건 클리핑거 북한연구관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