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새 기류 ‘탈이념·일상성’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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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설과 시에 두드러져…이문열·박상우·황지우·유하씨 등

 문학의 풍향계는 요즘 ‘脫이데올로기’와 ‘일상성’을 가리키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과 반성 그리고 개인 속에 잠재해 있는 정치성 등을 천착하는 소설이 한 흐름으로 떠올라 있다. 시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젊은 시인들은 지배이데올로기에 단선적으로 대항하던 80년대와는 달리, “욕망이 날 것으로 드러나는” 후기 산업사회의 도시·일상성의 문제를 주요 표적으로 삼고 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잇따른 국내 정치상황의 변화와 90년대로 접어들며 나타는 세계체제의 ‘지각변동’과 무관하지 않은 탈이데올로기와 일상성에의 관심은 물론 작가·시인들의 세계관에 따라 각기 다르다. 여기 한자리에 놓인 이문열 박상우 황지우 유하씨 등도 공통점보다는 다른 부분이 훨씬 많다. 하지만 이들이 최근 펴낸 작품집들은 90년대 문학의 징후와 그 얼개를 거칠게나마 일별하게 해준다.

 이문열(44)씨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84년에 나온 장편 《영웅시대》 이후 《변경》을 거쳐 이번에 나온 《시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의 주요한 테마였다. 그 이데올로기와의 간격을 젊은 평론가들은 “지배이데올로기 및 그 대항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라고 말한다.

 《시인》은 조선조 말기, 김삿갓으로 살다간 김병연(1807~1863)을 시인의 범주에서 새롭게 추적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김병연의 출가와 일탈적 생애, 문학관의 변모를 몰고간 힘이 지배이데올로기이며, 동시에 지배권력에 오르고자 하는 ‘변혁운동’의 허구성이었음을 강조한다. 《시인》은 홍경래 난과 관련된 반역죄인 김익순을 할아버지로 둔 김병연의 삶을 설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재구성한다. 김병연의 생애가 지금, 여기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와 반성
 특히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난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현지에서 전해들은 뒤 이른바 ‘민중시인’으로 전환하는 대목과, 다시 그 조부가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민초들을 이용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평등 세상을 내세우는 체제변혁운동과 자신이 추구해 온 ‘민중문학’에 절망, 김병연은 ‘동양적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시세계로 옮아간다. 작가 자신의 문학(세계)관을 드러낸 이 작품은, 결국 이데올로기의 대립구도에 벗어나 한 개인의 존재론적 완성에서 결말을 이루는 예술가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 시인이 ‘언어의 세계’를 뛰어넘는 과정을 그려낸 탁월한 예술가 소설이지만, 민중문학과 체제변혁운동에 대한 ‘뿌리깊은 경계심’을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전에도 그러했듯이, 민중문학권으로부터 “민중적 세계관을 도외시한 역사허무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박상우(33)씨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7편의 단편과 중편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데올로기 과잉연대였던 80년대를 20대로 살아온 세대의 암울한 초상이다. 소설 《샤갈…》속에서 ‘우리들’은 “그 버팀목(정치적 관심사)이 사라져버린 현실 속에서의 우리는 과연 어떤 형태로 잔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 익명의 우리들이 90년대 들목에서 정치적 허탈감을 어쩌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그러나 ‘잔존한’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손을 거머쥐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이 마지막 안간힘은 황지우씨가 80년대 말 ‘흩어진 백만대열’ 즉 87년 6월과 대통령 선거 결과에 정치적 환멸을 느낀 뒤 쓴 것으로 알려진 시 <눈보라>의 마지막 부분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와 맞물리면서, 90년대 문학이 출발해야 할 상징적 지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샤갈…》에 실린 또 다른 소설 <돌아오지 않는 시인을 위한 심야의 허밍코러스>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을 정치적 배경으로, 사회화되지 않은 한 무구한 무명시인이 어떻게 반공이데올로기에 무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시인을 위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웃사이더들은 그 시인이 즐겨 부르던 ‘찔레꽃’을 허밍코러스로 부르는 것인데 그 시인의 연이은 그 노래를 부르는 지기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그 욕설은 <샤갈…>에서 거머쥔 손처럼, 정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한 30대를 향해 던지는 야유이다. 작가는 위의 두 소설이 “정치 혐오, 허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반어법”이며 “공동체에 대한 기대”라고 강조했다. 그의 소설은 비평가들로부터 ‘정치허무주의’라는 평을 받아왔다.

 탈이데올로기 혹은 정치허무주의의 변주는 다양하다. 작가 고원정씨(35)는 개인에게 나타나는 정치성과 이념의 문제에 주목한다(작가와의 대화 참조). 정찬씨(38)는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실은 중편 《얼음의 집》에서 고문대상자를 사물로 보는 고문전문가의 내면심리를 통해 지배이데올로기의 폭력은 다름 아닌 인간의 권력의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한편 임철우, 이창동씨 등 80년대의 젊은 작가들이 지난 연대의 문학에 대한 반추의 한 결과로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유년시절, 인간의 운명을 다룬 소설을 각각 발표, 소설 영역의 새로운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화엄광주’와 ‘바람부는 압구정동’
 황지우씨(39)는 네 번째 시집 《게눈 속의 연꽃》은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는 존재론적인 세계와, 시집 제목 혹은 “어떻게 잡을꼬”와 같은 시행에서 물씬 풍기는 佛家의 초월적 분위기 그리고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하는” 삶의 일상성 등 다양한 갈래를 펼쳐보이고 있다. 80년대의 어둠을 지나오면서 지배이데올로기라는 우상을 끊임없이 해체시켜온 그가 80년대 말, 정치에 대한 환멸을 지나 일상의 부도덕성 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은 희망과 진리가 사리지고 ‘일상이 정신을 비웃는 이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게눈 속의 연꽃》은 “사다리를 오르는 게”처럼 이 진흙탕의 세계를 종교적인 상징 즉 <화엄광주>로써 극복해나간다. 희망이 거짓말이며 세상은 헛것이라는 각성과, ‘미래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을 통해 시인은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다 함께 종이 울리고/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긴 범종 소리 따라 울리리라”라는 화엄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 극복이 ‘개인적·초월적’이라는 비판이 없을 수 없지만, 평론가 류철균씨에게는 “황지우시인 자신이 신뢰해온 그 ‘시’를 방어하고 공동체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시인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다다른 운명”으로 해석된다. 류씨는 《현대시세계》 여름호에서 새로운 이념과 일상성을 시로 편입하는 젊은 시인들에게 “황지우 세대의 방법론은 그들 세대에서 절실한 것이었다”면서 80년대와는 다른, 이념과 방법론을 스스로 체득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황지우 및 그 세대가 이룩한 시적 성과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최근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도시와 그 일상성이다. 이들은 “이제 우리의 적은 일상”이라고 선언한다. 주목받고 있는 60년대생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하씨(27)는 서울 강남의 신시가지인 압구정동이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공장”을 통해 세기말의 일상, 즉 욕망의 생산과 소비과정을 희화화하고 있다.

 첫시집 《무림일기》에서 80년대의 정치상황을 무협지의 세계로 환치해 혐오와 야유를 퍼부었던 그의 위장약 광고에 나오는, ‘죽은 독재자를 닮은 탤런트’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이 일상적 세계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광고와 영화 같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 세기말의 일상은 수족관 속에 주입되는 “뽀글거리는 산소방울”로 살아가는 산낙지로 여겨진다. 압구정동이란 욕망의 공장은 ‘수족관’이며 그 속의 일상인들은 산낙지에 다름 아니라는 커다란 절망 상황이다. 그러나 압구정동과 대척점에 있는 그의 ‘고향’은 그의 일상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탈출구를 열어줄 수 있는 토양으로 보인다.

 도시와 일상의 문제는 젊은 시동인들인 <시운동> <전망, 21세기> <슬픈시학>이 올들어, 80년대를 주도해온 ‘정치적 상상력’ 등을 반성하는 동인시집을 각각 펴내며 시단의 한 경향을 이루었다. 90년대 사회와 문화의 한 징후로 “가치체계의 중심이 무력화”를 들고 있는 평론가 이윤택씨는 90년대 시가 담당해야 할 일상성은 “현실추수적인 대중함몰과 조직에 대한 거역과 뒤엎기의 상상력”이라고 지적한다.

 탈이데올로기나 일상성의 추구는 결국 지난 연대에 대한 반성과 90년대 문학의 길찾기로 이해되는데, 이같은 문학적 흐름을 《실천문학》은 ‘자유주의문학’으로 규정, 전면 비판하고 있다. 《실천문학》 여름호는 특집에서 가치의 상대주의에 바탕한 장주의 문학이 변혁운동에 끼치는 ‘해악’을 지적하면서 “중심이 없는 다원주의”인 역사(정치) 허무주의에서 “중심이 있는 다원주의”인 민중문학론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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