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로 치닫는 蘇민족분리 운동
  • 원수 편집위원 ()
  • 승인 1990.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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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최대의 정치위기… ‘다당제’ 약속 불구 아제르바이잔서 민족간 무력 충돌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의 개방 · 개혁정책의 최대 걸림돌이 돼온 소련의 민족문제가 지난 주말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단계로까지 악화돼 고르바초프를 집권 이후 최악의 정치적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전해진 이 유혈사태는 고르바초프가 리투아니아공화국의 蘇
연방에서의 분리 · 독립요구를 무마키 위해 리투아니아를 방문하고 13일 귀환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발생해 소련 지도부에 더욱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사태는 소련의 최대 현안인 공화국들의 연방 턀퇴 움직임과 민족분규사태가 한데 얽힌 사건이라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를 더해준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는 지난 13일 주민 15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脫蘇독립을 요구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고르바초프의 리투아니아 방문에 시기를 맞춰 조직된 이 집회는 열기가 더해감에 따라 인접 아르메니아공화국과의 해묵은 민족갈등문제로 비화되었다. 무장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에 몰려가 무차별 공격을 가함으로써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사태는 더욱 확대돼 이란과의 접경인 렌코란市의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정부건물과 경찰서까지 점거, 아르메니아공화국과의 영토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점거를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메니아공화국의 민족주의자들은 14일 그들 나름대로 자위대를 결성하고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전면전의 태세로 돌입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면서 蘇연방정부는 군부대를 현지에 급파, 사태진정에 나서고 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상황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방정부의 자의적 국경 조정이 불씨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민족분규는 1917년과 1920년에 각각 이들이 蘇연방에 편입된 후 1923년 중앙정부가 민족문제를 무시한 채 자의적으로 국경선을 조정한 이래 분쟁의 불씨를 안아왔다. 분규의 초점은 나고르노 카라바흐지역으로 이곳은 당초 아르메니아에 속했었으나 국경조정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편입됨으로써 ‘물위의 기름’과 같은 존재가 되어왔던 것이다.
 그후 양민족의 갈등은 내연상태를 지속해 오던 중 고르바초프가 등장, 대내외적으로 개혁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가 약화하면서 표면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민족간 갈등은 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 蘇연방정부로부터의 분리 · 독립 움직임을 부채질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파급효과는 이 지역뿐 아니라 발트해 3국에도 미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공화국에서도 분리 · 독립의 움직임이 지난해 이래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지난해 여름 동유럽의 개혁운동이 격렬해지자 소련은 △각 공화국에 더 많은 주권 보장 △공산당이 민족에 따라 분열되는 사태 반대 △전국적인 정치 · 경제 · 문화적 평등성 지지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민족 3개 원칙’을 발표, 공화국들의 연방이탈 움직임을 무마코자 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의 분리 · 독립운동은 동유럽국가들의 개혁운동 진척과 더불어 오히려 더욱 활기를 띠었으며 특히 리투아니아는 지나해 11월 경제적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12월에는 헌법상 공산당의 권력독점조항을 폐지하고 다당제를 허용하는 등 脫蘇 독립운동에서 여타 공화국들을 앞서나갔다.
 고르바초프가 최근 외빈들과의 면담까지 취소한 가운데 3일간의 리투아니아 방문을 결행한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였다. 고르바초프는 리투아니아의 당 지도자들에게 △蘇연방을 새로 구성하기 위한 헌법개정 검토 △다당제 수락 등을 약속했으나 리투아니아 지도자들은 그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고르바초프의 리투아니아문제 해결노력은 실패했으나 그가 밝힌 두가지 약속, 즉 새 연방체 구성과 다당제 수용 의사는 향후 민족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소련의 개혁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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