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선거는 대학에서 배워라”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3.11.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호 없애고 선거비용 결산 공개도… 올 총학생회 선거 ‘노선 변화’ 흐름 뚜렷
 대학가에서 11월은 선거의 계절이다. 전국 대부분의 대학이 이 즈음에 단과대학 학생회를 비롯해 총학생회 선거를 치른다. 국민대와 성신여대가 비교적 이른 11월 3~4일, 10~11일에 각각 선거를 끝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다수 대학이 이달 중 · 하순에 새 학생회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이처럼 늦가을의 캠퍼스에 선거 바람이 불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정치 열풍은 더 이상 불지 않는다. 마땅히 치열한 쟁점이 될 법한 ‘김영삼 개력’에 대해서조차 별다른 언급이 없다.

 정치 운동에서 생활 운동으로! 지난해 그 징후를 보여주었던 학생회의 이러한 노선 변화는 올해 들어 더욱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강의 평가제 도입, 취업정보학교 개설, 등록금 투쟁, 각종 복지 시설 개선 등은 대학 · 후보 구별 없이 애용하는 단골 공약이다. 이번 선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선진국 명문 대학은 물론 동남아의 대학들에도 못미치는 국내 대학들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가 활발하다는 점이다. 교욱 서비스 시장 개방이 멀지 않은 현실에서 사립 대학 학생들의 위기감은 더욱 크다. ‘재단 혁신 투쟁’이나 ‘사립학교 운영 개혁안’ 같은 공약들은 그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후보자들의 이념적 프리즘이 매우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정치운동에 매몰된 ‘당신들의 학생회’를 타파하겠다며 ‘비권’(비운동권) 후보자가 출사표를 던졌는가 하면, 경실련 대학생회는 ‘국민과 함께하는 학생운동’을 외치면 서울대 · 중앙대 · 전남대 등 5개 대학에서 후보자를 냈다.

후보자 다양, 미래지향 구호 ‘눈길’
 이미 선거가 끝난 국민대에서는 ‘생활 속의 학생 운동’을 강조한 비권 후보자가 당선됐다. 김준홍 학술부장(23 · 정외 4)은, 유세 때 학생들의 참여도가 낮아 걱정했는데 막상 끝나고 보니 투표율이 73%를 넘었다며 놀라워한다. “자기 생활 열심히 하면서 찾을 것 다 찾는 신세대의 특징이 잘 드러난 선거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경실련 대학생회는 중앙대와 한양대 한산캠퍼스에서 선전을 기대하고 있다. 김성연 대학생회 간사는 “학생운동에 대한 일반 학생들의 무관심이 경실련이 참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이 단체가 내세우는 주요 주장은 △선거관리위원회의 기능 강화 및 선거공영제 실시 △계급적 당파성보다 공공선 강조 △환경 문제 부각 △대학 경쟁력 강화 △새로운 통일운동 전개 같은 것들이다. 김간사는 “이제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경실련의 점진적 개혁 노선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졌다”라고 말한다.

 정치적 후진성을 질타받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올해 대학가 선거를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각 대학들이 고안한 선거관리 방법에는 공명 선거를 위해 고심한 흔적이 뚜렷하다.
 후보자들의 기호를 없앤 연세대와 성균관대는 그런 면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재필 성균관대 선거관리위원장(27 · 교육학 4)은 “무엇보다 학우들에게 후보자의 이미지가 자질이나 정치력보다 기호로 다가가는 경우가 많았다. 손가락으로 후보자의 번호를 알리는 것 같은 ‘은근한’ 부정투표의 소지도 있었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연세대 선관위측도, 취대한 공정한 정책 대결을 유도하기 위해 기호를 없앴다고 밝혔다.

 ‘비권’ 후보를 포함해 네팀의 후보가 나온 연세대에서는 지난 8일 ‘올바른 선거문화를 위한 모임’이 발족됐다. 연세사랑 작은 실천모임, 연세기독인연합회, 경실련 대학생회 등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선거 기간에 정책토론회를 열고 각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공개하라고 요구할 예정이다. 선거 관련 여론조사, 각 후보의 공약 비교 · 분석 등도 이 모임의 사업에 들어 있다.

 한편 성균관대 선관위는 선거 비용을 5백만원으로 제한했다. 이 금액은 몇장의 유인물을, 어떤 종이에, 어떤 방식으로 인쇄하는지까지 감안해 산출한 것이다. 이재필씨는 “각 후보 진영에 영수증을 첨부해서 선관위에 선거비용을 결산 공개토록 요구했다”라고 밝혔다.
 성균관대는 또 기탁금 제도를 마련해 각 선거본부마다 1백만원씩 내도록 했다. 이 기탁금 3백만원은 공동정책자료집 발간, 현수막 제작, 비디오 촬영 등에 쓸 예정이다.

 ‘새로운 세기를 예비하며’ ‘21세기로 도약하는 당신과 나의 시대 개척’ ‘통일운동 시대를 준비하며’…. 뚜렷한 선거 쟁점이 없는 이번 대학가 선거에서 표나게 도드라지는 또한가지는 바로 미래 지향적인 구호들이다. NL진영 일부, 진보정치대학생연합, 젊은 벗등 6개 정파가 연합한 ‘21세기 통일한국을 향한 진보학생 연대’나 경실련 대학생회, 비운동권 등 정치 입지가 전혀 다른 블록인데도 내세우는 구호는 엇비슷하게 들린다. 그 엇비슷함은 정치 운동에 무게 중심을 두어온 운동권 진영의 위기와, 그 위기를 돌파하려는 치열한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1세기 진보학생 연대’가 최근 서울대 · 연세대 · 고려대 등 서울 시내 8개 대학 대학생 1천9백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87%가 올해 학생운동 성적이 60점 이하라고 답했다. ‘대중과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는 과격한 투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대안 부재’ ‘운동조직의 분열과 대립’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

“신세대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한총련의 한 간부는 “87년 이후 학생운동이 대중화했지만 ‘학생이 주인’이라는 말은 구호에만 그치고 실제 학생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학우들의 요구에 주목할 때”라고 말했다. 또 연세대의 한 선거운동원은 “요즘의 이른바 신세대들은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비판적이어서 예전 선거 방식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제는 그들을 불러모으려 하기보다 우리가 그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세대는 압구정파나 오렌지족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대학가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받는 90년대의 새 세력이다. 김민식 고려대 선관위원장(23 · 수학교육 4)은 “지나친 개인주의에 바지는 것만 경계한다면,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선하고 비판하며 책임지려는 이들의 자세는 칭찬할 만하다”고 본다.

 문민 정부가 출범하고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등 개혁정책이 이어지면서 대학생들의 의식을 포함한 대학의 현실적 지형은 크게 다랄졌다. 많은 후보자가 “올해 운동에 대한 평가보다는 앞으로의 전망을 보여주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라고 밝히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진다. 하지만 아직 힘이 부치는 듯하다.
 93년 대학가 선거는, 91년 이후 딜레마에 빠진 학생운동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힘겹게 고민한 한 흔적으로 기록 될 것 같다.
金相顯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